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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와 문학


창작 수첩 | 소윤경

그림책의 경계를 넘어

1. 요즘 그림책은 사랑스럽고 예쁜 그림에서 벗어나 사회와 세계의 상처와 부조리함을 드러내려는 노력과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작가님의 그림책 『레스토랑 Sal』, 『콤비 Combi』 등에서 이러한 경계와 한계의 외연을 넓히고 계십니다. 기존의 금기 또는 한계와 상상력을 넓혀오는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님의 가치관과 작업 방식이 궁금합니다.

작가는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를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작곡가든 소설가든 무용수든 창작자는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반추합니다. 그림책 작가도 마찬가지죠. 누군가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싶어 하고, 또 누군가는 인간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세상의 문제들을 얘기하고 싶어 할 거예요. 사람들은 대체로 밝고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표현하는 사람에게 호감을 가져요. 세상을 유지하고 안정되게 하는 힘을 가졌으니까요. 하지만 옳지 않은 것이 있을 때, 누군가 용기 내 말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변화하기 힘들어요. 세계는 이렇듯 안정과 변화의 두 축으로 발전해 가요. 문화도 마찬가지죠. 그런 면에서 저는 세상의 그림자에 관심이 있는 작가일 거예요.

저는 일러스트레이터, 그림책 작가 이전에 제 자신을 ‘화가’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이미지들을 보여주는 것이 저의 일이지요.

어릴 때는 숨어서 만화를 그렸고, 청소년기에는 수묵화를 배우고, 대학 에서는 서양화를 전공했어요. 졸업 후 순수 미술가로 전시 활동하다 프랑 스로 유학을 가서 현대 미술을, 돌아와서는 일러스트레이터, 그림책 작가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그림을 그려 할 수 있는 여러 일을 두루두루 경험 해오고 있는 셈이죠. 크게 보면 다 비슷한 일 같지만 저는 그 사이에서 멀미가 날 정도로 다른 시각을 느껴 왔어요. 예술과 그림책, 일러스트레이션, 어린이에 대한 많은 편견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음을 말이죠.

예술성과 대중성이 서로 멀어져 왔듯이, 어린이와 어른의 세계는 너무도 극명하게 분리되어 있어요. 어른들은 문화를 통해 오히려 어린이를 대상화하고 선을 긋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어린이의 세계는 밝고 즐거우며 정의롭다고 거짓의 성을 지어두고 가두려는 게 아닐까요?

지구의 자연도, 동물도 인간의 기준에 의해 구분되고 대상화되어 이용 가치로 전락해 고통을 받고 있어요. 제가 그리고 싶은 세계는 크게는 생명의 평등과 공존입니다. 인간도, 동물도, 자연도, 곤충도 지구라는 별에서 보면 유한하고 연약한 생명에 지나지 않지요.

그림책 『레스토랑 Sal』(문학동네어린이, 2013)에 나오는 소녀와 감금되어 있는 동물들은 요리사의 입장에서 보면 단지 살아있는 식재료에 불과 합니다. 그들이 꿈이 있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진 않죠.

요리사의 임무는 단지 최고의 요리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들이 정한 목적과 목표로 세상을 잔혹하게 분류하고 끝없이 경계를 만들어가고 있어요. 생태계의 먹이 사슬 이상으로 지구의 생명을 과잉 소비하고 사멸시키고 있지요.

언젠가 우리의 후손들이 현 인류가 저지른 크나큰 과오의 대가를 받아야 할 거예요. 무능한 정부와 무감각한 사회 시스템이 세월호에 오른 아이 들을 무참히 수장했듯이 말이죠. 아직도 세계의 이곳저곳에서 전쟁이 끊이질 않고 대다수의 희생자들은 힘없는 아이와 여성과 노인들입니다. 단지, 사망자의 숫자로만 그들은 기록되고 잊히고 맙니다.

뉴스 속 지구 반대편 먼 나라의 이야기로만 들리지만 막상 여행을 떠나 보면 알게 되지요. 지구 반대편도 그리 먼 곳은 아니라는 것을.

인간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건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일 거예요.

『레스토랑 Sal』이 구제역 파동으로 가축을 산 채로 땅속에 묻어버리던 시절에 그려졌다면, 『콤비 Combi』(문학동네어린이, 2015)는 세월호 사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던 시기에 구상했어요. 채 꽃피지 못한 소년·소녀들의 죽음은 지금도 저를 가슴 아프게 합니다.

그 이야기들은 저희 집 정원의 작은 곤충의 죽음과 맞물려 상상의 이야 기로 엮어냈어요. 눈부시게 아름다운 시절을 살아보지 못한 소년·소녀들의 슬픈 이야기들을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사회를 믿기보다는 다른 생명체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미래 인간에 대한 공상이지요.

일러스트레이터로 빠듯한 일정에 그림책을 만들기는 쉽지 않았어요.

그림책은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드는 작업이니까요. 가볍게 그리고 주제를 명쾌하게 전하는 그림책도 많지만 저는 바닥까지 내려가 보는 성향 이라 시간과 노동이 많이 필요해요.

당장 의뢰 받은 일을 소화하기도 빠듯하니 그림책은 늘 뒤로 밀리기 십상이죠. 오직 그림책 작업에만 매진하는 작가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일 거예요. 계약금만으로 생활이 되지 않기 때문에 강연을 하거나 다른 일을 찾아야 하지요.

저는 오랫동안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다 보니 그림책 만드는 일을 오랜 숙원처럼 가지고 있었어요. 어느 정도 충분히 내공을 쌓고 나서 내 그림 책을 시작하고 싶었지요.

기존의 그림책과는 다른 방식의 작업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어요.

출판 시장에서 필요한 그림책에만 만족할 수 없었고, 어른들이 만드는 어린이의 세계가 다소 답답하게 느껴졌지요. 아동기에만 보는 그림책이 아닌 청소년과 어른들도 보고 즐길 수 있는 예술적인 그림책 작업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굳이 갤러리에 가지 않아도 좋은 그림을 볼 수 있고, 두꺼운 소설을 읽지 않아도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게 되는 그런 그림책을 만들고 싶어요.

2. 작가님의 작품에서는 평범한 일상의 모습도 낯설고 흥미롭고 색다르게 느껴집니다. 일상을 독특하게 표현하는 작가님만의 방법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저는 어릴 때부터 이상한 공상을 많이 하는 아이였어요. 다행히 부모님은 저에게 큰 기대가 없는 만큼, 간섭도 없으셔서 자유롭게 상상을 하며 만화도 그리고 이상한 물건을 만들기도 했었죠.

예를 들면 『톰 소여의 모험』(마크 트웨인)에 나오는 허클베리 핀이 사는 나무 위의 집을 짓고 싶어 했어요.

실제, 오래된 플라타너스 나무를 보고 다니며 집 지을 나무를 고르고 다녔죠. 나뭇가지의 모양에 따라 상상의 집을 구상하는 게 즐거웠어요. 어쩌면 그렇게 약간 부모로부터 방치될 수 있었던 게 저만의 세계와 공상 속으로 빠져드는 습관을 들인 듯싶어요.

저는 일단 무언가를 그대로 재현해서 그리는 일에는 관심이 별로 없어 요. 이미 입시 미술을 통해서 끔찍할 정도로 보고 잘 따라 그리는 건 익혀온 일이지요. 그려 보고 싶은 이미지들은 어느 순간 이미지 채로 떠올라 요. 주로 멍 때리는 순간에 어떤 형상이 머릿속에 그려지죠. 사실, ‘영감’이 라고 하는 건 오랜 시간 작업에 천착하다 보면 악상이 떠오르듯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일의 한 과정이지요. 떠오른 이미지에는 당시에 내가 생각하고 느낀 것들이 응축되어 있어요. 그걸 얼른 스케치해둬요. 한동안 그 이미지가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으면 그건 정말 제가 그려야 하는 그림인 거예요.

그림책을 구상하다 보면 ‘훅’ 하고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이 가끔 생겨요.

일단 재빠르게 콘티를 짜보고 스케치 더미를 대충 만들어요. 한동안 잊어 버리고 다른 일을 하다 보면 꼭 해야 할 이야기는 끝까지 저를 따라오더군 요. 결국, 첫 장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그게 새로운 그림책의 시작인 거죠.

3. 그림책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선배 작가들이 후배들에게 요즘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그림책은 잘 팔리지 않아 경제적으로 힘들다는 거예요.

어차피 책을 만드는 일은 사양 산업에 속해요. 하지만 아주 빨리 사라지 지는 않을 거예요. 의미를 가지고 좋아서 하지 않으면 정말 보상이 따르지 않는 힘든 일이지요.

저는 요즘 그림책 서평을 간간이 쓰고 있어서 새로 출간된 그림책을 많이 보게 되는데요, 아직까지 작가들이 그림책의 주된 독자인 어린이를 너무 의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미 유아,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 시장은 포화 상태이고 웬만한 아이템은 다 나와 있어요. 눈치 보지 말고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는게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반드시 출판사를 통해 책을 낼 필요도 없고 오히려 작은 서점에서는 독립 출판이 더 환영을 받기도 해요. 새로운 실험과 독자층을 넓혀가는 신선한 작품들을 풍성하게 보고 싶어요.

멋지고 화려한 일러스트레이션은 너무도 많지만 작가의 개성과 세계관이 집약된 그림책은 의외로 흔치 않아요. 출간이 되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견디고 그래도 남는 건 자기가 하고 싶은 책을 만들었다는 뿌듯함이죠. 신인일 때는 어떤 출판사와 편집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아요.

책을 내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 때문에 작가가 중심을 잡기가 상당히 어려 워요. 원래 만들고자 했던 그림책의 고유함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해요.

화가들은 그림을 굉장히 잘 그리고 싶어 하지요. 자신이 만족할 만큼 그려 내려다보면 지치고 자기 비하에 빠지기도 해요. 솔직히 제 얘기예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평가 받거나 상을 받은 책들을 보면 미술 비전공자 들이 더 많이 받은 경우를 종종 보죠. 어떨 땐 허탈감마저 들기도 해요. 그림책에서는 그림의 기준이 미술 전공자의 시각과는 차이가 있어요. 글과 같이 공명하는 이미지를 잡아야 하고 전달이 잘 되는 장면과 구도를 그려야 해요. 대부분 그림을 잘 그리면 일러스트레이션을 잘하는 게 아닌가 착각하죠. 그러나 책을 읽어 가다 보면 느낄 수 있어요. 좋은 글과 그림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그런 훈련을 많이 해야 해요.

출판물의 특성상 인쇄가 잘 되는 색채와 재료도 있고 요즘은 컴퓨터를 능란하게 잘 다루는 능력도 점점 중요해지고 있어요. 저도 컴퓨터로 작업 하기도 하는데 오히려 시간이 더 걸리고 눈도 피로하죠. 컴퓨터 작업의 장점은 수정하기 쉽고 디자인이 용이하다는 점 외에도 많아요. 잘하는 작가 들은 수작업과 구분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예요. 지금은 수작업과 컴퓨터를 모두 다 잘 다루는 작가들이 많아요.

그림책은 일반인과 미술 전공자의 눈에 모두 좋은 그림이어야 해요. 내용이 약하면 아무리 좋은 그림을 그려도 그림책으로서는 크게 의미를 가지지 못해요.

4. 그림책이 완성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시나요? 작품을 점검하는 과정이 궁금합니다.

저는 출판사에서 그림책이 만들어지는 일반적인 프로세스를 오래도록 익혀왔어요. 대체로 출판사로부터 글을 받아 그림을 그리게 되면 일반 적인 진행 과정을 거치게 돼요. 손톱 스케치, 본 스케치, 컬러링, 수정 등등……. 편집자, 디자이너와 수많은 수정과 조율 과정이 있어요.

하지만 제가 글·그림을 다 맡아 만드는 그림책은 되도록 이런 방식을 벗어나려고 해요. 저에게 맞는 흐름을 찾아가요.

『레스토랑 Sal』은 아예 출판사를 통해 출간이 어려울 거라 생각하고 스케치도 없이 한 달에 한 장씩 원화를 완성해 갔어요. 일러스트레이터로 바쁜 일정이라 막막한 창작 그림책을 위해 일정을 비워 둘 수 없었죠. 적어도한 달에 한 장이면 2년 안에 그림책 한 권을 만들 수 있을 거란 계산이었어 요. 중간 이상 컬러링이 진행되었을 때 오랜 시간 함께 작업해온 편집자에게 보여줬고 계약을 하게 됐어요. 내용이 당시로써는 파격적이라 편집자도 고심하셨을 거예요. 원래는 글 없는 그림책으로 만들 생각이었는데 글을 써 보라고 해서 처음엔 부딪혔죠. 하지만 나중에 보니 편집자 말을 듣길 잘했어요. 그림책은 많은 사람이 함께 만드는 게 아니라 소수의 팀이 만든 다고 볼 수 있죠. 소통이 잘 되는 현명한 편집자를 만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해요. 그런 점에서는 저는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어요.

『콤비 Combi』 역시 편집자의 권유가 아니었다면 책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출판에 필요한 그림들은 대체로 작은 편이라 저는 큰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저는 화가이기도 하기 때문에 큰 그림이 익숙하고 맘대로 그리는 게 제일 쉽고 좋아요.

전지 사이즈에 드로잉을 해서 전시를 했고 보러 온 편집자가 그림책으로 묶어보자고 했어요. 이번에도 글을 써 보라고 했고요. 드로잉이 거진 20 점 정도 완성되어 갈 무렵부터 글을 써 나갔죠.

마치 안개 낀 망망대해에 배를 띄운 기분이었어요. 당시 전쟁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던 시기라 자연스레 스토리가 만들어져 갔어요. 중편 정도의 SF 판타지를 써 나갔고 이를 그림책에 어울리게 정리해 나가는 과정이 참으로 지난했어요. 그림 그리는 일은 쉬웠는데 글 쓰는 게 무척 힘들었어요.

책을 출간하고 전시를 같은 시기에 했지요. 『콤비 Combi』는 하나의 창작물을 출판과 전시라는 다른 분야의 두 개의 창으로 보여 주려고 시도한 작업이에요.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만나는 그림책인 동시에 갤러리나 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는 미술 작품이지요.

낯선 작업이라 독자들의 반응이 빠르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책과 전시로 알려지고 있어 흐뭇해하고 있어요. 끝날 것 같지 않은 일도 돌아보면 어느새 시간 저편 뒤로 물러나 있네요.

5.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올해 초에 출간할 예정인 그림책 『호텔 파라다이스』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어요. 작업 분량이 많아서 2년간 다른 일을 거의 하지 않고 집중했 어요. 에너지와 체력을 많이 소진해서 이번 그림책처럼 힘든 작업은 더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몇 년간 틈틈이 써온 에세이집도 나올 듯해요. 글을 잘 쓰는 편은 아니지만 그림책 작가,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살아가는 일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다만 어디까지 진솔하게 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글은 그림과 달라서 자칫하면 칼처럼 주변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도 있잖아요. 저 자신을 너무 노출하기도 두렵고, 그렇다고 제 성격상 부드럽고 유연하게 글을 쓰기는 어려울 것 같고요. 저도 어떻게 책으로 만들어질지 궁금하네요.

전시도 앞두고 있어서 올 한 해는 조용히 책상 앞에서 지낼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 좀 줄어들 것 같아요.

하지만 좋은 글을 만나 그림을 그리는 일 역시 저에게는 큰 즐거움이기 때문에 일러스트레이터로도 꾸준히 작업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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