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하고 커피와 술과 담배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 즈음, 한 선배의 제안으로 인사동에서 그룹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림 걸고 나중에 오픈할 때 드러난 그룹전의 전모는 당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지만, 뭐라도 해야했을 그 시절엔 선배에게 낚인 것이라도 어쩔 수 없었다. 단지, 그 그룹전에서 마음에 남는 자유분방한 그림이 딱 한 점 있었는데, 그 그림을 그린 작가의 이름은 ‘소윤경’이라 했다.
오픈에서 만났는지 안 만났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그로부터 한 칠, 팔 년 지난 후, 뭔가를 한참 검색해서 찾다가 ‘일러스트레이터 소윤경’이란 이름을 발견했다. 허걱. 그 강렬했던 드로잉의 작가가 ‘일러스트레이터’라니. 만난 적도 없는데 벌써 그 사람 속이 어떨지 알 것 같았다. 어째 어째 찾아들어간 그의 홈페이지에 ‘화가와 일러스트레이터’라는 글이 몇 편 있었고, 부글 부글 끓는 마음으로 공감하며 읽었다. 비행기타고 열 몇 시간 날아가야해서 못 갔지, 당장이라도 붙들고 한 잔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언젠가 만나면 물어보리라. 아니 도대체 왜 일러스트레이터 ‘따위’를 하는 거에요? 그런 활활 타오르는 그림을 뿜어 대던 사람이, 왜 일러스트레이션 ‘따위’를 하는 거에요? 왜 이 따위, 대접도 못 받는 일을 하는 거에요? 왜 이따위, 만날 수 없는 일을 하는 거에요?
결론부터 말하면, ‘화가’와 ‘일러스트레이터’는 화해할 수 없다. 나는 합리화의 귀재답게, 교묘하게 화가의 일과 일러스트레이터의 일을 봉합하여 헷갈리게 만들고 있는 반면, 소윤경 작가는 그 부글부글 부대낌을 그냥 날 것으로 드러내어 버리는 것 같았다. 자기 표현대로, 아수라 백작처럼 두 세계의 끝에서 정신없는 레이스를 펼치는 거다.
처음엔 얼마 안 가 때려칠 거라 확신했다. (암, 때려쳐야지!) 그런데 그 (예상되는) 무수한 좌절과 고뇌의 갈피 속, 시간이 지날 수록 이 작가가 이걸 은근히 즐기는 거 아냐…싶더니만, 이번 전시를 보니 어느 정도 답이 나온 듯 보이는 거다. 참. 대단하다.
소윤경 작가의 이번 생쥐와 악어와 박쥐와 희한한 인간들이 등장하는 드로잉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 바닥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떤 것을 끝까지 밀어부쳤을 때만 나올 수 있는 어떤 경지가 보인다. ㅎ 진지한데 웃기고, 진중한데 가벼운 느낌이랄까, 순수와 비순수를 나누는 것은 이미 의미가 없고, 그보다는 경계를 살짝 비틀면서 보는 이를 계속 경계에 서있게 한다고나 할까. 그의 드로잉에 도사리고 있던 불안함과 불편함이 새로운 프레임을 통과해 나오면서 고무공처럼 허공으로 가볍게 튀어오르고 있다.
‘레스토랑 살’은 어쩌면 그 출발점이었는데(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인이 책임졌다는 의미에서), 그런 종류의 책이 나올 수 있다는 최초의 의미와 여러가지 업적(!)들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책에 여전한 부담감이 살짝 배어있었다. 그런데 이번 그림들을 보면, 뭔가 새로운 균형점을 찾은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보다 더 원래의 그의 그림들로 돌아간 듯한 편안함 위에 능글한 블랙 유머가 곁들여져,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강력한 힘과 유쾌함을 발산하고 있다.
소윤경 작가가 맨날 하는 소리가, 자기 그리고 싶은 그림 실컷 그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럼 그 반대가 일러스트레이터냐면, 뭐 꼭 그렇진 않다. 뭐 꼭 그렇지 않은 그 지점이, 바로 화가와 일러스트레이터, 그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렸다.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지극히 '순수'한 자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약간 자학 비슷하게 이 쪽을 파다보면, 어떤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그리고 경계에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디테일한 재미가 있다. 어쩌면 그도 나도, 그 재미에, 이 ‘따위’ 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는 것일 지도.
(그런데 계속 환청이 들린다. “아 그냥 밥먹고 살아야 되니까 하는 거지 뭘!”)
뭐 우짜든동,
화가가 아니면 일러스트레이터냐?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니면 화가냐? 둘 다 아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소윤경씨의 드로잉에서 찾아보시라.
-그림책 작가 이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