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화가 ‘안견’의 <몽유도원>에 이제 막 도착한 노병이 협곡 아래를 굽어본다. 오랜 여행의 종착지이자, 유토피아에 마침내 발을 내 디딘 것이다. 기나 긴 전쟁 끝에 살아남은 노병의 몸은 상처와 먼지투성이다. 문득, 그가 배낭에서 자신의 낡은 화첩을 꺼내 펼쳐 놓는다. 화첩은 전쟁 속에서 그가 직접 그리고 써내려 간 어린 병사들에 관한 기록이다.
부상당한 소녀가 메뚜기의 등에 업혀있다. 날개가 부러진 박쥐를 힘겹게 부축해 일어서는 병사도 보인다. 사춘기 소녀의 머리를 잘라주는 늙은 도마뱀과 서로의 손을 맞잡은 쥐와 소녀의 모습의 그림도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제스처에는 관계의 내러티브가 담겨 있다. 그림 속 주인공들에게는 서로가 헌신적 가족이자 동료이다. 그러나 결코 생태적으로 만들어진 가족이 아니다. 그들은 피폐해진 미래사회에 남겨진 새로운 생명체의 조합들이다. 전쟁은 숙명이지만 파멸한 세계 속에서도 인간은 희망을 꿈꾼다. 대부분의 포유류가 멸종해 버린 미래세계, 인류는 인간의 지성과 육체로 대등하게 변형 된 곤충과 파충류, 몇 종의 해양생명체에 의지해 새로운 세대를 이어 나간다.
식량난과 자원부족으로 국지적인 크고 작은 전쟁들은 끊이질 않는다. 어린 병사들은 배우고 보호해 줄 어른들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서로를 의지해 전쟁 속에서도 소소한 일상을 공유한다. 디스토피아에 남겨진 이들은 낡고 부자연스런 옷과 신발을 착용하고 있다. 현대의 인간이 누리고 있는 넘치는 풍요로움은 유한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항상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저 전쟁이, 죽음이 흔한 또 하나의 일상일 뿐인 것이다.
인간과 콤비를 이루어 살아가는 새로운 종들은 낯설고도 친근한 모습들이다. 작고 보 잘 것 없어 보이는 곤충이나 애벌레, 쥐, 도마뱀들로 인간의 동료 혹은 가족이 되어 콤비를 이루며 살아간다. 그들 사이에서도 사랑이나 집착, 애증과 질투 등의 다양한 감정들이 만들어진다. 인간이 가지지 못한 육체적 능력을 가진 새로운 콤비들의 등장과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내러티브는 인간들만의 관계와 결코 다르지 않다. 그들은 변치 않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연대의식으로 전쟁 속에서 최후까지 삶과 죽음을 함께 한다.
이 드로잉 연작은 회화적인 방식으로 그려졌으며 그 후에 완성 된 그림을 보면서 스토리를 만들어 단편 분량의 SF소설을 썼다. 그리고 화면을 배치하고 디자인 작업을 거치며 글과 그림이 함께 하는 화첩 형태의 그림책으로 만들어 출간되었다.
<콤비>시리즈는 회화와 출판 미술에서 활동하며 원작의 희소성과 복제미술의 대중적 가치에 고심해 온 오랜 결과물이다. 전시와 책, 글과 그림이라는 서로 다른 분야가 상호적인 콤비를 이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