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어린이와 문학> 소윤경의 그림책읽기(2015년 4월호)
최근 들어서 글과 그림을 모두 화가가 창작하는 그림책이 부쩍 많아졌다.
대략 200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일러스트학교(HILLS)나 한겨레 일러스트레이션학교 등에서 배출한 신인 작가들이 활동하면서 국내 창작 그림책의 출간 수는 눈에 띄게 늘었다.
신인 작가들이 첫 그림책으로 해외에서 수상하거나 판권을 수출하며 화려하게 데뷔하는 경우도 종종 생기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이전 세대 작가들에게는 창작 그림책을 만든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을까?
먼저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수련 과정을 충분히 가져야 하며, 좋은 원고를 만나 그림을 그리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우리나라 출판 시장에서 동화책과 그림책을 위한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시작했던 화가들에게는 글과 그림을 함께 창작한다는 것이 그만큼의 자신감과 내공을 쌓은 후에 시도할 수 있는 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어린이 출판 시장이 대중에게 소비될 수 있는 그림책 위주로 움직였기 때문에 주제가 일반적이고 구성이 획일적인 기획 그림책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를테면 그림책은 16~17 펼침 면 정도에 따듯한 화풍과 긍정적인 결말을 도출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오히려 이제는 그 틀을 처음부터 다시 깨고 새로운 그림책을 시도해야 하는 것이 기성 작가들의 고민일 것이다.
음악가가 작사, 작곡을 다 해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처럼 한 작가가 그림책에서 글과 그림을 모두 창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문장과 스토리를 쓸 수 있는 소설가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듯 그림책도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다고 해서 좋은 그림책 작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림책은 그림이 큰 역할을 하기 때문에 문학성이 빈약해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글이 그림책을 구성하는 장면과 리듬을 고려해서 그림이 표현할 영역을 남겨 둘 수 있어야 한다.
글과 그림을 한 작가가 모두 창작하는 그림책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독창성이다.
그림책의 장면을 구성하다 보면 글로 인해서 필요 없는 그림을 넣어야 할 경우가 종종 생긴다. 이럴 때 화가가 직접 페이지 수를 증감할 수 있고, 자신감 있는 이미지로 화면을 구성할 수 있다면 훨씬 효과적이고 다양한 방식이 만들어질 수 있다.
단점으로는 그림은 예술적일 수는 있지만 주제의 전달력이 떨어진다거나 내러티브가 허술해질 수 있으며,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과 시각화로 인해 불친절한 그림책이 될 소지가 있다. 말하자면 난해한 현대 미술에서 불거지는 ‘관객과의 소통’이라는 문제점이 그림책에서도 반복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글 작가와 화가가 협업하는 그림책의 장점은 무엇일까? 문장과 전체적인 스토리가 튼튼한 뼈대를 만들어 줌으로써 보다 안정적인 구성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준다. 지금까지 출판되었던 대다수의 그림책이 이런 협업을 통해 생산되었다는 것은 그만큼의 효율성이 검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협업의 단점도 있다. 대체로 글이 먼저 쓰였기에 화가가 다양한 실험적인 장치를 만들기 쉽지 않다. 글의 내용 안에서 상상력을 키워야 해서 화가에게는 이미지의 범위가 다소 제한적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결국 글과 그림을 함께 하거나 따로 하거나 그림책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이 분명하다. 나는 이전의 지면들을 통해 화가가 글과 그림을 모두 창작한 그림책을 위주로 서평을 했었다. 이번 호에서는 글 작가와 화가가 협업하여 조화를 이룬 그림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림책 『엄마 마중』(보림, 2013)의 김동성 작가를 한국의 대표 그림책 작가라고 손꼽는 것을 마다할 독자들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작가 본인은 자신을 일러스트레이터라고 말한다. 좋은 그림책은 일러스트레이션의 연장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독자들에게는 그림책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그 개념조차도 모호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개념을 아주 명료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무엇이 회화인지, 일러스트레이션인지 구분하는 것만큼이나 유동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회화는 곧 일러스트레이션이고 그림책 또한 일러스트레이션이기도 하다.
뭔가 마구 아리송한 얘기 같지만, 상업적 목적성을 띤 것으로 일러스트레이션을 구분 짓는다면 거의 모든 인류의 역사적, 종교적인 그림들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우리가 미술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전 미술품들은 대개 종교화나 초상화, 역사화 들이다. 20세기 현대 미술 이전 시대의 미술 작품들은 지배 계급들 즉, 종교 집단과 귀족 계급의 요구에 의해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현대 미술 이전의 모든 그림들을 회화와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양분하기는 어렵다.
미술 작가가 사상과 철학을 전면적으로 내세워 그림을 개념의 도구로 쓰기 시작한 현대에 와서야 순수 회화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또한, 산업 사회의 사용 목적에 부합하는 그림들이 요구되면서 현대 순수 회화와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분류가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오늘날에는 혼재된 개념들이다. 순수 미술 작품 역시 자본주의 안에서 기업들과의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한다거나, 상업적 목적성과 함께 결합해 나가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굳이 이런 장르와 개념에 대해 지면을 할애하는 것은 좋은 작품, 좋은 작가들에게는 그 구분과 경계가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그림책 출판계는 물론이고 신인 작가들조차도 카테고리와 장르라는 속박과 굴레에 스스로 갇혀 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주홍 작가의 단편 동화 「메아리」는 1959년에 발표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이주홍 작가의 단편 동화 중에 가장 아름다우며 한국의 향토적 정서가 잘 녹아 있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 동화가 김동성 작가의 그림으로 2001년 그림책으로 출간되었다.
깊은 산골에 화전민으로 살아가는 아버지와 누이와 어린 소년이 있었다. 이웃도 없고 친구도 없는 소년에겐 누이가 엄마이자 친구 같은 존재였다. 그런 누이가 산 너머로 시집을 가게 되자 홀로 남겨진 소년은 외로움과 그리움에 슬퍼한다. 첩첩산중, 외톨이 소년에게 남은 친구라고는 자신이 말한 그대로 대답해 주는 메아리뿐이었다. 누이를 찾아 나선 소년은 산속에서 길을 잃는다. 깊은 밤, 소년은 다행히 자신을 찾아 나선 아버지한테 발견되고 집으로 돌아간다. 뜻밖에도 누이가 떠난 집에는 새 식구가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갓 태어난 송아지였다. 소년은 첫눈에 새 식구가 맘에 들었다. 소년은 새 식구 소식을 멀리 산 너머의 누이에게 메아리로 전한다.
미술을 전공한 사람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눈에도 김동성 작가의 그림은 나무랄 것이 없을 것이다. 한국의 수묵화가 한 권의 그림책 속에 고스란히 들어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독특한 향수와 풍경들이다. 김동성 작가의 그림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은 한국인의 보편적인 감성과 서정을 풍부하게 재현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다. 마치 오래도록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불려 왔던 흔하고 친숙한 노래였는데 목청 좋은 소리꾼의 입을 통해 들으니 새삼 그 격조가 다르다고나 할까? 김동성 작가의 수묵담채화는 익숙하지만, 아름답고 깊다.
언젠가 사석에서 그는 자신이 작가로서 잊힐까 두렵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신인 작가들의 재기 발랄한 작품들이 속속 등장하는 요즘, 수묵화를 잘 그리는 작가들도 많을 뿐더러 전통 수묵화 기법 이외에 별다른 변형을 거치지 않은 자신의 그림이 언제까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하는 근심을 내비치는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아직까지 수묵화로 한국의 산하와 풍습들을 김동성 작가만큼 따듯하고 정성스럽게 그려 내는 화가를 나는 보지 못했다. 과연, 김동성 작가가 꼭 자신의 이야기와 글로 그림책을 만들어야 진정한 그림책 작가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이미 어느 작가들 못지않게 그림책에서 독자가 보고 싶은 그림과 이야기를 풍성하게 펼쳐 내고 있다.
언젠가 돌아가신 권정생 선생님의 생가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이정표를 따라 한적한 시골의 마을길을 거슬러 올라 동네를 지나니 후미진 낮은 언덕이 나온다. 언덕을 돌아서자 그곳에 마치 쓸쓸하고 초연한 노인처럼 앉아 있는 작은 흙집이 보였다. 산수유나무에는 노랑 리본이 가득 달려 있었다. 살아 계실 때 심어 놓으신 한 평도 안 되는 부추 밭도 보인다. 툇마루에 앉으니 돌아가신 외할머니 댁에 와 있는 착각이 들었다. 권정생 선생님은 인세 수입으로 얼마든지 편하고 따듯한 집에서 여생을 보내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다. 권정생 선생님은 마치 고행하는 수도자처럼 살다가 돌아가셨다. 방명록에 아이들이 남긴 글들은 할아버지에게 손주가 얘기하듯 따듯했다.
「강아지와 염소 새끼」는 6.25전란 당시 15세 소년이었던 권정생 선생님이 쓴 시였다.
시 그림책 시리즈로 묶여 작년에 출간되었으니 참으로 오래된 글이 그림책으로 되살아
난 것이다.
심심한 강아지는 말뚝에 줄이 매여 있는 염소 새끼에게 다가와 함께 놀자며 치근댄다. 염소는 강아지를 치받으려 하지만 줄이 닿지 않아 약이 오른다. 마침내 줄이 매여 있던 말뚝이 뽑히고, 벼르고 있던 염소 새끼는 강아지를 뒤쫓는다. 넓은 들판을 옥신각신 술래잡기하듯 달리는 둘의 모습은 차라리 즐거워 보인다. 때마침 들린 제트기의 굉음에 둘은 혼비백산한다. 해가 저물고 권정생 선생님처럼 보이는 어르신이 두 녀석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저녁밥 짓는 연기 자욱한 시골마을 풍경은 권정생 선생님이 실제 사시던 집과 마을을 그대로 책 속으로 옮겨 놓았다.
김병하 작가는 그림책에 잘 어울리는 염소 캐릭터를 그리기 위해 취재를 여러 차례 다녔다고 한다. 갈색 파스텔로 그려 낸 강아지와 검은 콩테로 그린 검은 염소는 금방이라도 책 밖으로 깡충거리며 뛰어나올 기세다. 관념적으로 사진을 보고 그려서는 결코 이토록 생명감 넘치는 캐릭터를 잡기 어렵다. 화가의 열정과 노력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전체적으로 과감하게 배경을 생략했는데, 그로 인해 염소 새끼와 강아지의 동작에 집중할 수 있다. 여백은 더 자유롭고 광활한 공간을 독자가 상상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김병하 작가는 권정생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을 그림책 가득 담았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스승인 권정생 선생님이 이렇게 그림책 속 마을에서나마 귀여운 강아지와 염소 새끼와 영원히 살아 계실 수 있어 기쁘다.
하이쿠는 일본의 매우 유명한 시 형식이다. 열일곱 음으로 지은 정형시로 계절의 감각을 살린 간결하고 함축적인 글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시인과 여우』(보림, 2001)는 일본의 대표 하이쿠 시인인 바쇼에 대한 이야기를 미국인인 팀 마이어스가 쓰고,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던 한성옥 작가가 그림을 그렸다. 미국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한, 출판된 경로가 특이한 그림책이다.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져 일본에서 출간된 것이 아니라 미국인에 의해 쓰였고, 한국인이 그리고 미국 어린이들이 읽게 된 그림책인 것이다. 국경을 지워 버린 그림책이라 할 수 있겠다.
바쇼는 일본 에도시대 자연 시인으로 하이쿠의 스승이라고 일컫는 인물이다. 생전에 바쇼는 중국 한시의 영향을 받아 세속을 떠나 초야에 은거하며 자연과 인간의 세상을 관조하는 시를 썼다. 글을 쓴 팀 마이어스는 일본에서 삼 년간 지냈으며 일본을 비롯한 동양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깊은 산중에 홀로 사는 시인 바쇼는 어느 날 자신이 아끼는 버찌를 따 먹는 여우를 만난다. 여우는 자신들이야말로 위대한 시인이라며 바쇼에게 훌륭한 시를 지어내면 버찌를 양보하겠노라고 한다. 기회는 단 세 번뿐이다. 바쇼는 계절과 함께 아름다운 시를 짓는다. 오월 보름날에는 ‘자두 향 풍겨 산 길 위로 일순간 솟는 아침 해’란 시를 지었지만 퇴짜를 맞는다. 유월 보름엔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든다 물소리 퐁당’이라는 하이쿠의 대표적인 시도 쓴다. 하지만 웬일인지 여우는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마지막 한 달 동안 바쇼는 마음에 드는 시를 쓰지 못하고 전전긍긍한다. 여우를 만나러 가는 길, 여름 달을 보며 바쇼는 문득 시 한 수를 떠올린다. 결국 여우는 단지 그 시에 여우가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완벽한 시라며 시인에게 무릎을 꿇는다. 결국 좋은 시나 예술이란 것도 그것을 공감하는 독자의 몫이 아닌가 싶다. 나와 아무런 관계없는 예술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 독자에겐 자신의 얘기가 등장하는 시가 가장 훌륭한 작품일 수 있다.
한성옥 작가는 수채화로 바쇼가 살 법했을 산중의 풍경과 사계절을 담담하고 스케일 있게 그렸다. 빛과 그림자를 적절히 그려 넣어 시공간을 잘 살렸다. 달빛이 주는 음영을 서늘하면서도 몽환적으로 표현해 숲의 계절 냄새까지도 배어 나오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바쇼의 시가 들어가는 장면은 일본 문양을 배경으로 장식적이면서도 정적으로 표현해 한편의 시화로서도 아름답다. 장면마다 다양한 시점을 이용해서 지루하지 않게 구성한 능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 길에 세발이가 있었지』(봄봄, 2011)는 야마모토 켄조가 글을 쓰고, 이세 히데코가 그림을 그렸다. 글이 주는 서정성을 그림이 한껏 더 큰 울림으로 증폭시켰다. 이 책 또한 글과 그림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그림책이 아닐까 싶다.
글은 유년기의 가슴 아픈 성장기를 담담한 내레이션으로 써 내려간다. 그림의 배경은 이세 히데코가 유학을 했던 파리의 흔한 골목길이다. 엄마를 잃고 숙모 집에 얹혀살게 된 소년은 길에서 살아가는 떠돌이 개 세발이를 만나게 된다. 다리가 세 개지만 달리기를 좋아하는 세발이는 외로운 소년에게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공원 앞에서 학교 아이들에게 매를 맞고 쓰러진 소년의 모습은 그림만으로 설명이 충분하다. 눈이 내리는 어느 날, 세발이가 보이지 않아 동네를 헤매던 소년은 쓰레기 더미 속에서 두 발이 묶인 세발이를 찾아낸다. 무심히 걸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소년은 서둘러 자신의 외투를 벗어 얼어 죽어 가는 개를 감싸 안는다. 세발이는 아마도 소년이 자신을 구하러 와 주리라 굳게 믿고 기다린 것은 아닐까? 무심히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이 장면은 눈시울이 붉어질 만큼 가슴 아프고 감동적이다. 마지막 시간의 흐름을 보여 주는 장면에서도 글이 없이 흰 구름 가득한 하늘이 긴 여운을 남긴다.
투명한 수채화로 감성적인 표현력을 자랑하는 이세 히데코의 실력에 감탄한다. 어린 날의 슬픈 동화를 이토록 섬세한 풍경으로 그릴 수 있는 화가가 또 누가 있을까 생각해 본다. 그림만 넘겨 보아도 내용이 어느 정도 짐작이 가지만 감정을 울리는 정제된 글로도 감동받게 되는 작품이다. 우수가 가득한 그림이 글을 어루만져 준다. 세발이와 소년처럼 말이다.
문학과 미술이라는 서로 다른 분야의 길을 걸어온 두 작가의 글과 그림이 한 권의 그림책 속에서 녹아들어 환상의 콤비를 이룬다.
그림책은 한 명의 작가에 의해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예술품이 될 수도 있다. 또한 글 작가, 디자이너, 편집자, 출판 기획자, 화가가 함께 고심하며 만들어 가는 협업 작품이기도 하다. 오늘도 작가들은 다양한 방식 안에서 자신만의 방법과 길을 찾아 나선다.
이제 세상에 나온 그림책은 하나의 생명체처럼 독자들을 만나며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