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어린이와 문학> 소윤경의 그림책읽기(2015년 3월호)
“누구의 영향을 받으셨나요?”
“좋아하는 작품이 무엇이죠?”
작가들은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아마도 질문자는 작가의 스타일이 만들어진 토대를 유추해 보려는 것이리라.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진 상상력이나 창조력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인작가는 일정 기간 동안 자신이 좋아하는 작풍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단련되며 조금씩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간다. 한 시대의 문화는 이전 세대가 이루어 놓은 기존 문화에 대한 반항과 향수, 역발상에서 출발한다. 한 세대의 문화는 그 양분을 먹고 자란 다음 세대에겐 친숙하지만 한편으론 숙명처럼 벗어나고 싶은 속박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림책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나라의 그림책 역사는 짧지만 문학과 예술사의 줄기로부터 새로운 가지를 뻗어 나가고 있다. 아울러 전혀 다른 문화 영역을 과감하게 접목하고 확장해 나가기도 한다. 그림책은 문학 이외에도 만화, 영화, 애니메이션, 디자인, 공연예술 등의 다양한 문화를 흡수하면서 새로운 형식으로 도약해 가고 있다.
작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영화감독 팀 버튼의 전시가 있었다. 전시장은 관람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제대로 작품을 감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왜 영화감독이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었을까 궁금했다. 팀 버튼은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선명한 작가적 색채를 지니고 있다. 팀 버튼의 영화에서는 결코 주류에서는 보기 드문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가위 손, 유령신부, 화성인 등 괴기스러운 외모에 뚜렷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들이다. 내용 또한 공포와 판타지, 코믹을 섞어 놓은 한 편의 잔혹동화를 보는 느낌이 든다. 미술관을 찾은 관객들은 아마도 팀 버튼 감독의 상상과 꿈의 원천을 만나고 싶었을 것이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매력적인 상상의 세계로 이끄는 것인지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팀 버튼 감독은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그가 가장 존경하는 아티스트는 누구였을까?
그중 한 아티스트인 에드워드 고리(1925~2000)를 소개한다.
에드워드 고리의 그림책들은 국내에서는 절판 위기를 맞고 있다. 애초에 에드워드 고리의 그림책들을 국내에서 번역 출간한 것 자체가 일종의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의 그림은 예술적이지만 난해하며 불온하다. 하지만 이 괴짜 작가는 미국에서는 아주 유명하고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존경받는 작가이다. 딱히 어린이 그림책 작가라고는 말하기 어려우나, 그림책의 형태를 띤 100여 권의 책을 발표하였다.
『펑 하고 산산조각 난 꼬마들』(황금가지, 2005)의 표지만 보아도 첫눈에 팀 버튼의 〈유령신부〉가 떠오른다. 이 책은 A부터 Z까지의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 불의의 사고로 어처구니없이 죽음을 맞게 되는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묘사했다. 이 책을 접한 이들은 도대체 작가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작품을 만들어 냈을까 하고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할 것이다. 『불운한 아이』(미메시스, 2006)의 내용은 더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아버지를 잃은 아이가 험악한 세상에서 어디까지 불행해질 수 있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결말은 비극적이고 끔찍하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불쾌한 기분마저 들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책을 집어 던져 버리고 싶어질 지도 모른다.
에드워드 고리는 작가, 화가, 무대 디자이너 등 다양한 작업으로 인정을 받아 온 예술가이고 지식인이다.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 풍의 의상을 입은 인물과 절제된 배경은 섬세한 펜 터치만으로 그려져 있다. 고상한 옷을 차려 입은 신경 쇠약에라도 걸린 듯한 캐릭터들은 당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실존주의 문학에 나오는 인물들을 전형적으로 묘사한 듯하다.
하지만 이 음울하고 불길한 분위기 속에서도 인물들의 예상치 못한 행동은 묘한 긴장감과 왠지 모를 익살을 전해 준다. 우리는 얼마나 불온한 것으로 가득한 세계에 살고 있는가? 삶이란 얼마나 나약한 토대 위에서 이어져 가고 있단 말인가? 에드워드 고리는 우리에게 태연하게 묻는다.
오마주(hommage)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가 확립되지 않은 작가에게는 적절치 않는 표현방식이다. 잘못 해석하면 아류나 표절이 될 위험성이 크다. 그만큼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품에 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패러디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익히 알려진 작품의 힘을 입어 관객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장점은 있겠지만, 새로운 해석과 변형을 가미해 원작을 비틀고 각색해서 재치와 익살, 새로운 재미등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국내에서 인기 있는 그림책 작가 앤서니 브라운은 1933년 제작된 흑백영화 〈킹콩〉을 보고 언젠가 꼭 킹콩에 대한 그림책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고 했다. 또한 앤서니 브라운이 고릴라를 그림책에 자주 등장시키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오마주라고 한다.
앤서니 브라운의 『앤서니 브라운의 킹콩』(넥서스주니어, 2005)은 마치 영화의 다양한 스틸 컷처럼 구성되어 있다.
여주인공 앤은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와 닮았고, 앤의 연인인 선장 잭은 작가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은 듯 보인다. 앤서니 브라운은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와 마그리트의 영향을 받아 비현실적인 판타지의 세계를 손에 잡힐 듯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미리 물에 적셔 둔 종이에 조금의 얼룩도 없이 꼼꼼하게 그려낸 수채화 기법을 주로 사용한다.
화가들은 가장 그리고 싶은 단 하나의 장면에서 그림책 구상을 시작할 수도 있다.
킹콩이 섬에서 큰 뱀과 익룡과 싸우는 장면과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른 장면에서 인물을 그릴 때는 작가가 약간 지루해하며 그린 게 아닌가 싶게 건조하다. 반면에 킹콩의 표정을 보면 그 차이를 독자들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얼마나 킹콩 그리기를 즐거워하고 킹콩의 감정에 몰입되어 있는지 말이다. 앤서니 브라운은 영화보다도 정작 어린 자신에겐 두렵지만 경외의 대상이던 킹콩같던 아버지를 그리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 죽어가던 킹콩의 슬픈 눈빛은 오래도록 마음에 여운을 남긴다.
흑백 영화와 흑백 TV의 화면으로도 감동을 받을 수 있던 시절, 여름이면 납량특집으로 인기리에 방영되던 〈전설의 고향〉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중 최고의 공포는 단연 〈구미호〉였다. 구미호가 변신을 할 때면 아이들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실눈을 뜨고 겨우 보거나, 화장실도 혼자 갈 수가 없었다. 김성민의 『여우누이』(사계절, 2005)는 구미호로 알려진 옛이야기이고 그림책으로는 드문 공포 장르를 다뤘다.
요즘은 컴퓨터 기법으로도 다양한 판화적인 느낌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래서 그림책을 위해 복잡한 과정의 목판화를 제작한다는 것은 사실 수지가 안 맞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기법의 완성도를 위해 목판을 파고 찍어 내는 수고로움을 감수한 김성민 작가의 장인정신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김성민의 『여우누이』 그림을 보면 떠오르는 작가가 있을 것이다. 판화가 오윤(1946-1986)이다. 오윤은 1980년대에 우리 민족의 샤먼과 한의 정서, 민중의 고단한 삶을 목판화로 표현한 리얼리즘 작가다.
우리나라의 예술 교육은 지나치게 서양 문화 위주였다. 한국 미술사는 그 영향 아래에서 뿌리 없는 계보를 접목해 왔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작품 속에 민족적 정서를 가장 확연하게 표현한 작가가 오윤이다.
오윤은 전통 무속과 탱화, 민화, 탈춤, 굿 등을 연구해서 자신만의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만들어 냈다. 투박하고 단순한 칼 맛이 잘 나타난 지옥도나 도깨비, 살풀이를 추는 여인 등을 보면 서민들의 해학과 신명이 잘 드러나 있다.
이중섭의 작품만큼이나 강렬한 그의 판화 작품들은 책 표지 등의 출판물로도 남아 있어 많은 후배 작가들에게 영감과 영향을 주었다.
김성민의 『여우누이』에서 마지막에 여우가 불에 타 죽어 가는 장면을 보면서 오윤의 작품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김성민의 목판화 기법은 오윤의 영향을 받아, 보다 대중적으로 세련되게 발전시킨 느낌이 든다.
『여우누이』는 그림과 더불어 글씨체도 마치 활자 목판인쇄를 한 듯 그림과 조화로운 폰트가 잘 어울린다. 종이도 전체적으로 미색의 색지를 기본으로 해서 차분하면서도 오래된 고서를 보는 듯한 느낌을 살렸다. 그림책은 화가가 요리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맛깔스럽게 그릇에 담아낼 수 있는 편집디자이너의 역할도 매우 중요함을 또 한 번 깨닫게 된다. 전체적으로 그림책으로서 흠 잡을 데 없는 완성도를 보인보기 드문 옛이야기 그림책이다.
동양과 서양의 미술 작품을 적절히 잘 조합하여 새로운 그림책을 만든 박연철의 『피노키오는 왜 엄펑소니를 꿀꺽했을까?』(사계절, 2010)는 제목부터 궁금증을 자아낸다. 도대체 엄펑소니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 그림책은 책을 하나의 오브제로 보고 여러 면에서 즐길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얌전히 책장을 넘기며 읽는 것만이 아니라 펼치고 세우고 뒷면을 돌려서 볼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책은 세로로 긴 판형으로 마치 병풍과 같은 구조다. 병풍처럼 펼쳐 세워놓고 그림을 감상할 수도 있고 아코디언처럼 늘리고 줄일 수 있어 자유롭다. 책 자체가 하나의 입체 작품이 되는 것이다.
책을 펼치면, 영화감독 히치콕이 등장하여 수수께끼를 풀라고 한다. 왼쪽 페이지에는 민화 문자도가 그림처럼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문자도는 원래 양반들이 충효나 삼강오륜 같은 교훈적인 의미를 지닌 글자를 병풍으로 만들어 감상해 온 것이었으나 일반 민중들이 나름의 회화적인 방식으로 그려 널리 파급시킨 민화의 일종이다. 오른쪽 페이지에는 염색된 천을 바탕으로 동서양의 회화와 사진 등이 콜라주 기법으로 구성했다
르네 마그리트의 〈백지 위임장〉과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김홍도의 〈서당〉,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 비례도〉 등도 보인다. 그림문자인 픽토그램(pictogram)을 넣어 내용을 표현한다는 것은 그림책에서는 무척 신선한 시도라고 여긴다.
내용을 보면 옛사람들이 중요시 여기던 사람이 지켜야 할 여덟 가지 도리인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를 작가 나름의 재미난 이야기로 풀어 나갔다. 그리고 이야기는 은근슬쩍 반대되는 결말을 맺는다. 예를 들어, 엄마 잉어가 죽순을 먹고 싶다고 하자 아들 잉어가 우연히 요술부채를 얻어 죽순을 손에 넣는다. 하지만 아들 잉어는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죽순을 먹는 것을 효라고 한다는 식이다. 동생이 맞든 말든 모르는 척하는 착한 마음을 ‘제’라 하고, 나라가 망하든 말든 제 몸만 챙기는 것을 ‘충’이라며 거꾸로 말한다.
이렇게 재미난 이야기와 반대되는 가르침이 있고 그림 안에는 숨어 있듯 코가 길어진 피노키오가 등장한다. 피노키오가 계속 거짓말을 꾸며 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피노키오의 얼굴은 실제 작가의 어린 시절 사진이라고 한다. 이야기를 따라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하면 또다시 히치콕 감독이 나타난다. 피노키오가 엄펑소니를 꿀꺽 삼켰으니 잘 찾아보라고 말이다. 피노키오의 몸통에 바코드처럼 보이는 줄무늬들이 보인다. 책을 이리저리 기울여 보면 어느 순간 엄펑소니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박연철 작가는 우리 민화 문자도의 가치를 일깨우고 해학적인 이야기로 풀어 옛 선인들이 지키고자 했던 올바른 사람의 도리를 알기 쉽게 전해 주려고 한다. 이 책은 전통문화에 대한 오마주인 동시에 미술 작품들에 대한 패러디 그림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미술 작품과 기법들을 섞어 퓨전 요리를 만들 듯, 실험적이고 모던한 그림책의 지평을 넓히고자 했다. 작가는 그림책 안에 작은 미술관을 만들어 놓았다. 책을 다 읽고 책장에 꽂아 두기보다는 병풍처럼 펼쳐 두고 보는 것도 새로운 감상법이 될 것이다.
이제 막 그림을 시작하는 학생들은 어떻게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갈 수 있냐는 질문을 하곤 한다. 우선은 자신이 끌리고 공감하며 동경하는 작품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그러면 왜 그런 것에 끌리게 되는지 자신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이 꼭 작품이어도 좋지만 다른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요리, 스포츠, 고고학, 여행, 무용 등등 자신의 경험과 진실을 녹여 낼 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실마리가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