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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국경 없는 그림책.- 글 없는 그림책을 말하다

월간 <어린이와 문학> 소윤경의 그림책읽기 (2015년 2월호)

그림책은 마치 짧은 여행과도 같다. 많은 사람이 다녀간 유명 관광지를 체험하는 여행이 있을 것이고, 순간순간을 자신의 감각이 이끄는 대로 여행지의 후미진 골목이나 시장에 들러 원주민의 삶 속에 스며들어 보는 여행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평온한 휴식 같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여행자도 있고, 거친 모험을 즐기고 싶은 배낭 여행자도 있다. 어떤 여행을 원하든 이미 여행자들은 몽상가이며 용기 있는 사람이다. 여행지의 어느 카페에서 낯선 음악을 듣고 느꼈던 신선함처럼 우연히 찾은 작은 갤러리에서 본 그림에 감동했던 것처럼 그림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도 마찬가지다. 그림책을 펼쳐 들면 작은 여행이 시작된다. 혼자여도 좋고 둘이라도 좋다. 여럿이 둘러앉아 함께 읽으면 그 느낌 또한 새롭다. 고정된 시각과 사전 지식을 가진 감상법이 아니라 그저 낯설고 신비한 세계에 모든 감각을 열어 둔 채로 빠져 들어가 보는 것도 좋다. 미술관을 관람할 때나 클래식 음악을 감상할 때, 사람들은 그 작품의 배경과 작가의 일대기와 작품의 시대적인 의미, 가치 등에 대하여 전단으로 미리 숙지한다. 성인들은 문자 세대로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교육을 성실히 수행한다. 늘 작품 설명서를 먼저 읽고 나서야 작품 감상에 임할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한다. 무작정 자신의 감각으로 부딪쳐 보고 느끼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림책 또한 책이라는 전제하에 문자가 전하는 이야기를 그림이 설명해 주는 방식에 익숙하다. 유독 독자들은 다른 여타 문학 작품과 달리 그림책에서만은 모호하고 막연한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추상회화 같다거나, 결말이 모호하게 끝나 버리면 이를 잘못 만든 그림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림책의 그림이 현대미술이 아니라는 생각과 아름답고 따뜻한 이야기와 그림으로 어린이 수준에서 쉽게 읽혀야 한다는 편견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림책에서 글이 빠지면 어떻게 될까? 독자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 주던 부모라면 글이 이끌어 주던 서사 구조가 없는 그림책을 보면 당황할 것이다. 이제 글이 없어진 자리는 독자의 주도적인 상상력을 요구한다. 부모는 일방적으로 책이 전달하는 구조에서 자유로워졌다. 아이와 함께 서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새로운 그림책 읽기를 완성해 갈 수 있다. 독자에게는 집중력과 능동적인 상상력이 더 필요한 것이 바로 ‘글 없는 그림책’이다. 그렇다면 화가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글 없는 그림책은 온전히 화가의 주도로 만들어지는 그림책이다. 그림만으로도 독자와 소통할 자신감이 있을 때 ‘글 없는 그림책’은 비로소 가능하다. 그림이 이미지를 가지고 있듯 글도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미지를 글이 설명하거나 그림이 글의 내용을 자세히 묘사할 필요는 없다. 화가는 그림만으로 이야기를 끌고 갈 때 자칫 설명적으로 나열하기 쉽다. 그림이 글이 해주던 이야기 전개의 역할을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창작 그림책에서도 글과 그림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그림책은 드물다. 그림책 원고가 이미 있는 상태에서 화가에게 그림을 의뢰하거나, 화가가 글과 그림을 모두 진행하는 그림책이라도 글과 그림의 균형적인 호흡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 그림의 이미지가 글의 내용을 묘사하는 수준에서 그려지면 오히려 상상력을 규제하는 식상한 그림이 나오게 된다. 글과 그림의 조화보다는 재료와 스타일에 치중하거나, 잘 그리는 것에만 집착하기 쉬운 게 화가의 습성이다. 물론 글 작가도 이미지에 대해 지나친 설명으로 그림의 영역을 침범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림책을 만들 때 글 작가와 화가가 만나서 함께 토론하며 그림책을 만들어 나가는 경우는 드물다. 작가들이란 개성과 고집이 센 경우가 많아 아무래도 협업 작업이 곤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글 작가로부터 “그림이 맘에 들지 않았다!”라는 소릴 들은 경험이 있는 화가도 있을 것이다. 공동 창작물이지만 글 작가는 원고 작업이 먼저 시작되었기 때문에 우선권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화가가 맘에 들지 않는 그림을 그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이 먼저 그려졌다면 어떨까? “글이 맘에 들지 않는다!”라고 할 것인가? 그런 경우는 필자도 보지 못했으니 뭐라 말하기 어렵다. 창작 그림책을 구상할 때 화가의 입장에서는 전공 분야가 아닌 글을 써야 하는 두려움이 있다. 그림 그리는 것에 치우쳐서 글을 부수적인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마치 아이에게 말하듯 어색한 어법의 글을 쓰게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벗어날 수 있어 화가들은 글 없는 그림책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소개할 그림책 작가는 화가들에게 존경받는 작가 가브리엘 뱅상이다. 가브리엘 뱅상의 대표적인 글 없는 그림책으로 『어느 개 이야기』(별천지, 2009)와 『꼬마 인형』(별천지, 2009), 『거대한 알』(열린책들, 2003)등이 있다. 작가는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를 바로 종이에 스케치해서 그림책을 만들었다. 그의 책은 스쳐 가는 순간순간의 생각을 메모하듯, 숨 가쁘게 그려 낸 스케치의 더미로 보인다. 작가는 감정이 실려 있는 연필 선들은 그대로 살려 두었다. 수정을 거듭하며 밀도 있게 그리는 다른 회화 기법과는 달리 순간을 포착한다. 굉장한 집중력이 요구되는 드로잉이 끝까지 이어진다. 대체로 화가가 그림책을 구상할 때, 원고를 적은 후 글을 페이지에 따라 분류해 스케치한다. 반대로 스케치로만 더미북을 만들어 보고 나중에 글을 넣기도 한다. 수많은 스케치와 수정 과정을 거쳐 스케치 더미북이 만들어진다. 마지막으로 본격적으로 채색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 순서이다. 하지만 가브리엘 뱅상의 그림책은 오로지 종이와 연필, 콩테의 기초적인 재료가 전부이다. 가브리엘 뱅상의 그림책은 일반 독자보다 화가들에게 더 인기가 많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 드로잉 실력을 갖췄는지 화가들은 너무나 잘 알 수 있다. 자신감 넘치는 필력, 빛과 공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생략된 선을 정확하고 군더더기 없이 표현하였다. 거기에 이야기꾼으로서도 가슴을 움직이게 하는 재능을 가졌다. 그중 『어느 개 이야기』(별천지, 2009)는 이러한 뱅상의 장점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유럽의 휴가철, 수많은 개가 도로 위에 버려진다. (유럽은 늘 휴가철마다 버려지는 개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한 마리의 개가 한 가족이 타고 있는 자동차 밖으로 버려진다. 여기서 개가 필사적으로 자동차를 쫓아가는 장면을 살펴보면, 속도감 있는 여러 겹의 선으로 개의 절박한 달리기를 동적으로 보여 준다. 마치 종이 위를 달리는 연필의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다시 줄거리로 돌아가서, 그야말로 공황에 빠져 버린 개는 다른 차를 주인의 차인 줄 알고 달려들어 교통사고를 유발한다. 도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불이 붙은 차들과 당황하는 사람들, 출동한 구급대가 화재를 진압하는 일대 혼란이 일어난다. 개는 겁에 질려 이 상황을 바라본다. 글이 없는 그림책이지만 상상만으로도 이야기 속 소음들이 귓가에 쟁쟁히 들려오는 착각이 든다. 개는 자리를 피해 홀로 길을 떠난다. 흐릿한 몇 줄의 선으로 개가 황량한 벌판에 있음을 알 수 있고, 멀리 작은 배의 물그림자만으로 바다에 다다른 개의 배경을 유추할 수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길 위에 홀로 남겨진 생명의 외로움이 느껴진다. 도시의 뒷골목을 배회하는 개에게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어느 날, 한 소년이 다가와 개와 눈을 맞추고 버림받은 개의 사정을 알아본다. 과연 개와 소년은 어떤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독자는 개에게 감정이 이입되어 두려움, 막막함, 절망감 등의 감정을 고스란히 따라가게 된다. 페이지 수는 기존의 그림책보다 많지만, 결코 밋밋하거나 지루하지가 않다. 가브리엘 뱅상의 그림책에서 여백의 공간은 중요한 의미가 된다. 독자들은 소리를 듣고, 공기의 냄새를 맡으며, 빛의 변화를 본다. 독자가 상상력으로 함께 색칠하며 완성하는 그림책이다.

가브리엘 뱅상처럼 단순한 재료와 정제된 선으로 그림책을 만들어 낸 그림책 작가가 또 있다. 『파도야 놀자』(비룡소, 2009)로 알려진 이수지는 글 없는 그림책으로 독보적인 아우라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걸출한 그림책 작가이다. 이수지의 그림책 ‘경계 삼부작’ 중 하나인 『거울속으로』(비룡소, 2009)는 펼친 책의 경계를 가장 잘 활용한 그림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책이라는 물질적 성질 즉, 책을 펼치면 가운데 접히는 부분인 경계선을 좌우로 대칭 시켜 두 세계를 오가는 판타지를 만들어 낸다. 목탄 드로잉과 데칼코마니 기법의 컬러가 들어간 얼룩이 좌우 대칭을 이루며 책이라는 공간이 거울을 마주 보는 상황으로 변화된다. 이수지의 그림책에 등장하는 소녀는 혼자 놀기를 즐기는 명랑하고 씩씩한 소녀다. 어쩌면 작가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누구나 한 번쯤 거울을 등지고 앉아 손거울을 비춰 본 경험이 있으리라. 그때 거울 속으로 자신의 모습이 끝도 없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필자도 점점 작아지는 거울 속의 끝은 어디일까 상상해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우주를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신비롭고 가늠할 수 없어 숨 막히는 기억이다. 책을 펼치면 한 소녀가 오른쪽 페이지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있다. 다음 페이지를 펼치면 양 끝에서 서로를 보며 놀라는 소녀가 있다. 공간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소녀는 거울 속의 소녀가 자신임을 알고 거울을 보며 즐겁게 놀기 시작한다. 아울러 데칼코마니가 배경으로 퍼지며 소녀의 신 나는 감정을 표현한다. 거울 뒤편으로 사라지는 장면에서 빈 백색의 페이지가 나온다. 그 뒤론 거울처럼 반대 방향이어야 할 다른 소녀가 같은 방향에서 춤을 춘다. 심지어 거울 속의 소녀가 시차를 두고 춤을 따라 추기 시작한다. 마침내, 거울 속 소녀의 제멋대로인 행동에 화가 난 소녀는 거울을 밀어 버린다. 거울은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다시 첫 장면의 쭈그리고 혼자 앉아 있는 소녀가 왼쪽에 페이지에 있다. 매번 같은 그림을 비슷하게 그린 것이 아니라 컴퓨터로 복사해 반전시켜 배치하였고 시작과 끝이 같은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뒤표지에서 거울을 바라보는 소녀의 뒷모습이 거울 속에서도 뒷모습으로 나타나 살짝 무섭게 느껴진다. 그것은 우리가 늘 보아온 현실이고 당연한 원리를 한 번쯤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 준다. 이수지는 그림책이라는 그릇의 물성과 시간성을 잘 파악하고 있다. 그것을 효과적이고 완벽하게 연출해 내는 흔치 않은 그림책 작가이다. 그림책 속에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풀어 가는 고전적 방식보다는 개념적이고 디자인적 감성과 회화적인 드로잉이 만나 그만의 독보적인 그림책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

가브리엘 뱅상과 이수지가 드로잉 필력으로 승부를 겨루는 작가라면 엄청난 시간과 밀도로 승부를 겨루는 신진 작가가 나타났다. 그림책 『양철곰』(리젬, 2012), 『빅 피쉬』(비룡소, 2014)의 이기훈이다. 일단 그의 그림책을 펼쳐 들면 작가의 엄청난 노동에 기염을 토할 수밖에 없다. 화가들이라면 잘 알 것이다. 이 작가가 온전히 그림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집중하고 고심했을 지를. 한 권의 그림책을 완성하기 위해 견뎠을 인고의 시간을 말이다. 현실에서 그림책 작가 들이 견뎌야 하는 경제적 고통은 만만치가 않다. 의뢰로 들어오는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병행하면서 본인의 창작 그림책에 몰두하기는 정말 어렵다. 작가 정신으로 무장한 채,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창작에 몰두하는 것은 그만큼의 희생이 필요하다. 이기훈의 『빅 피쉬』는 그림책이라기보다 그래픽노블에 가깝다. 작가는 칸 만화 형식으로 스토리를 이어 나간다. 펜 선 위에 수채 채색을 입힌 다소 고전적인 그림 스타일이지만, 한 컷 한 컷에 공들인 그림으로 시대에 구애받지 않는 안정적인 느낌의 작품이다. 무엇보다 영화를 보는 듯 화면을 압도하는 웅장한 스케일은 그림책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한다. 아프리카인 듯한 배경의 대지는 오랜 가뭄으로 메말라 있다. 마을 추장은 생명의 물을 뿜는 전설의 물고기가 산다는 지도의 장소로 건장한 용사 네 명을 보낸다. 그 길에서 용사들은 거대한 배를 짓고 있는 노인을 보게 된다. 하지만 지독한 가뭄에 배를 만드는 정신 이상한 사람이라 여길 뿐, 가던 길을 재촉한다. 마침내 용사들은 천신만고 끝에 전설의 물고기를 잡아서 마을로 돌아가려 한다. 그러나 온갖 동물들이 이들의 귀환을 저지하며 무더기로 쫓아온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까지 쳐들어오는 동물들을 필사적으로 막아 내며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전투에서 승리한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차지한 물로 한동안 풍요로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물고기를 가두었던 울타리가 물고기의 팽창한 몸뚱이를 이기지 못해 터지고 만다. 물고기는 끝없이 물을 쏟아 내고 엄청난 비까지 내리면서 세상은 거대한 홍수에 잠기게 된다. 그때, 노인이 완성한 거대한 배에는 모든 동물이 올라타 있다. 자연을 거스르고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한 인간은 결국 파국을 맞는다는 이야기다. 마치 노아의 방주가 연상되는 내용으로, 아프리카라는 이국적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판타지 세계에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흡입력 높은 그림책이다. 만화가의 눈으로 보면 그래픽노블이 그림책의 분야로 들어와 오히려 신선한 평가를 받게 된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화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라면 다소 복고적인 그림책으로 느낄 수 있다. 어떤 작품이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새로운 스타일이어서가 아니라 당시에 흔치 않은 스타일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 작품이 유명세를 타게 되면, 그에 영향을 받은 비슷한 스타일의 그림들이 유행하게 된다. 운이 좋지 않은 한 원래의 작품은 더는 독보적인 위치를 잃게 된다. 유행처럼 화풍이나 스타일도 반복되고 순환된다. 이기훈의 『빅 피쉬』는 어른들에게는 친숙한 그림스타일일 것이다. 하지만 어린이들에게는 새로운 느낌의 그림이고, 스토리 전개 방식도 새로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기훈 작가에게는 무엇보다 인간의 탐욕이 불러들이는 재앙이라는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를 웅장한 스케일로 흥미진진하게 이끌어 가는 힘과 재능이 있다. 다음 작품이 무척 기대된다.

글 없는 그림책은 어쩌면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해석이 많아질수록 더 풍부한 성과를 이룬 것일지도 모른다. 화가들은 글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을지는 모르나 소통을 위한 표현력을 그림만으로 갖춰야 하는 만큼 전체적으로 구성과 장치에 더욱 많은 노력과 공력이 필요하다. 자칫 잘못하면 글이 없어서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빨라지기 쉽다. 그림으로 매력과 궁금증을 자아내지 못하게 되면, 독자들은 흥미를 잃고 휘리릭 대충 넘겨버리기 때문이다. 작가는 마치 대사가 없는 한편의 마임이나 마술을 보여주듯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글 없는 그림책은 국경도 없다. 번역도 없다. 문맹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가장 평등한 그림책이다. 지구인 남녀노소 누구나 바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어쩌면 외계인들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하하하. 결국, 글 없는 그림책을 완성하는 것은 독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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