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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금기를 깬 그림책. -그림책으로 본 부조리한 세계(2015년 1월호)

월간 <어린이와 문학> 소윤경의 그림책읽기(2015년 1월호)

“고통 없이 아이들은 성장하지 못한다.” “항상 아이들에게 두려움을 보여 준다. 두려움은 극복해야만 하기 때문 이다.” 『달 사람』, 『세 강도』, 『곰 인형 오토』 등으로 국내 독자에게도 알려진 그림책 작가, 토미 웅거러의 말이다. 최근 국내에서 영화 〈랄프 스테드먼 스토리: 이상한 나라의 친구들〉과 〈토미 웅거러 스토리〉가 연이어 개봉되었다. 모처럼 화가로서 공감할 반가운 기회였다. 고흐, 잭슨 폴록, 앤디 워홀처럼 순수 미술가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영화는 종종 제작되었지만, 그림책 작가나 일러스트레이터를 다룬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화가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 중 하나가 다른 화가의 작업실일 것이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재료와 종이를 보면 스타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대충 유추해 볼 수 있다. 화가들에게 새로운 재료와 기법에 대한 탐구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중요한 열쇠일 것이다. 〈랄프 스테드먼 스토리: 이상한 나라의 친구들〉에서 랄프 스테드먼은 잉크 흘리기와 에어 브러쉬를 이용한 번짐 효과 등의 드로잉 제작 과정을 보여 준다. 재료의 우연성과 이미지의 연상 작용으로 쌓아 가는 작가만의 시니컬한 드로잉을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그림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는 야심만만한 화가의 노력이 애니메이션의 힘을 얻어 스크린 위로 펄펄 날아다닌다. 토미 웅거러는 독일과 프랑스의 접경지인 알자스 출신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다. 미국으로 건너간 토미 웅거러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들끓던 60년대 격동의 미국 사회를 향해 풍자적이고 비판적인 그림을 쏟아 내며 일러스트레이션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또한, 이전과는 다른 성향의 그림으로 그림책 작가로서의 유명세를 얻어 나갔다. 토미 웅거러는 귀엽고 사랑스러워야 한다는 그 시기의 그림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어둡고 비극적인 결말과 강도, 박쥐, 뱀 등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모리스 샌닥은 토미 웅거러를 절대로 존경하지는 않지만 큰 영감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토미 웅거러는 당시 미국 사회의 반전과 여성 해방의 기조에 공감하며 성에 대한 적나라하고 기발한 발상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 토미 웅거러가 어린이 도서관 협회로부터 상을 받으러 간 자리에서 누군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포르노를 그리는 자가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 상을 받을 수 없다고 말이다. 이성을 잃은 토미 웅거러는 당시로선 과격하고 충격적인 말을 했다. 이후 토미 웅거러의 그림책은 도서관에서 모조리 폐기되었고, 누구도 더는 토미 웅거러를 찾지 않았다. 토미 웅거러는 23년간 그림책 작가로서 절필해야 했다. 그것은 한 예술가의 불운이기 이전에 토미 웅거러의 그림책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도 큰 손실이었던 사건이었다. 예술가로서 사회의 금기를 깨고자 했던 토미 웅거러의 다큐멘터리는 그림책 작가는 물론 어린이 출판 관련 종사자들에도 추천한다. 이미지를 언어로 삼는 그림책 작가의 생각과 작업 과정을 알아가는 것은 그림책을 이해하는 중요한 포인트이기도 하다. 몇 년 전 그림책 공부 모임에서 갓 출간된 권윤덕의 『꽃할머니』(사계절,2010)를 두고 회원들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꽃할머니』는 한, 중, 일 세 나라의 그림책 작가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 그림책을 만들자는 취지로 만든 첫 책이었다. 그림책의 내용보다는 일제강점기 위안부라는 소재를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지, 어른들은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어쩌면 어른들조차 종군 위안부는 떠올리기 싫은 역사적 상처일 것이다. 딸을 가진 부모들에게 일본 군인들이 바지를 내리는 장면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물었다. 부정적인 반응들도 있었다. 토미 웅거러는 충격을 주는 것이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것이라 했지만, 부모의 입장에서는 꺼려지는 일일 것이다. 랄프 스테드먼이나 토미 웅거러가 종군 위안부를 그렸다면 아이들은 확실히 충격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권윤덕 작가는 자신의 감정과 거리 두기를 하면서 직설적인 화법을 배제하였다. 만일 『꽃할머니』의 그림이 인물을 중심으로 사실적인 원근법과 입체감을 강조하는 사실주의적 기법이었다면 독자들은 주인공에게 몰입되어 괴롭고 불편한 감정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꽃할머니』의 그림은 전통 동양화 기법으로 색채가 차분하고 인물들은 동적이지 않다. 주인공 캐릭터도 보편적인 소녀와 할머니의 모습이다. 얼굴과 몸이 없는 군복만으로 익명성 뒤에 감춰진 전쟁의 폭력성을 표현하였고, 소녀가 흘리는 피는 분홍색 바탕에 파란 제비꽃을 띄워 표현했다. 『꽃할머니』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고 싶은 것〉에서 권윤덕 작가가 이 부분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하고 반복해서 수정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그림이 혐오와 충격으로 묘사되지 않도록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군인의 계급에 따른 입장료와 사용 시간, 대대 별로 이용할 수 있는 할당표가 그려진 장면에서 국가에 의한 조직적인 성폭력이라는 위안부의 처참한 실상을 가늠할 수 있다. 우려와 달리 한국과 일본에서 그림책 모니터링에 참여한 학생들은 전쟁의 참상과 역사적 문제를 직시하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꽃할머니』는 그림책 작가가 자신의 화실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림책으로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 주는 사회 참여적인 작품이다. 그리고 작가의 손을 떠난 그림책이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고 묻힌 역사를 바로잡는 과정을 보여 준 좋은 예일 것이다. 한 소녀가 맞닥뜨리는 도시의 황폐함과 폭력성은 로베르토 인노첸티가 그린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빨간 모자』(사계절, 2013)에 무시무시하게 녹아 있다. 고전 「빨간 모자」를 패러디한 그림책으로 현대의 혼란스러운 도시가 배경이다. 소녀는 빈민가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소녀는 큰길로만 가야 한다는 엄마의 당부를 뒤로한 채 수많은 자동차와 무관심한 사람들을 지나 혼잡하기 이를 데 없는 도시의 한복판으로 간다. 소녀는 카오스의 정점인 쇼핑몰에서 화려한 구경거리들에 정신이 팔려 방향을 잃고도 시의 뒷골목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곳에서 소녀는 불량배들을 만나게 되는데, 가죽점퍼를 입은 남자가 소녀를 구해 주고 오토바이로 변두리에 있는 할머니 집 근처로 데려다 준다. 하지만 소녀는 끔찍한 일을 당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소녀를 구해 준 남자가 불량배와 한패였다. 소녀가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샤를 페로의 「빨간 모자」와 사냥꾼에게 구출되는 그림 형제의 「빨간 모자」는 결말이 다르다.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빨간 모자』는 비극적 결말로 슬퍼하는 독자들을 위해 부록처럼 해피엔딩을 한 장 더 만들어 놓았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이 범인을 잡아가고 구출된 소녀는 할머니와 엄마를 만난다. 로베르토 인노첸티는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지금도 피렌체 근처에 산다. 『마지막 휴양지』와 『그 집 이야기』를 섬세한 투명수채기법으로 작업했다면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빨간 모자』는 과슈와 아크릴을 사용한 불투명기법으로 밀도를 높이는 고된 작업을 해냈다. 이 재료들은 섬세하게 표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발색이 탁해지기 쉽고, 인쇄할 때 색이 잘 나오지 않아 매우 까다롭다. 출판된 책은 원화의 색을 충분하게 살리기 어려웠으리라 짐작이 간다.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빨간 모자』는 전후 독일의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 新卽物主義 : 자아의 주장이나 감정의 표현을 억제하고, 사실을 바탕에 두고 사실 자체로 말하게 하는 기법) 미술가인 오토 딕스, 게오르게 그로스의 회화에서 보이는 현실 고발적 시각이 강하게 보인다. 신즉물주의는 독일 표현주의에 반하여 나타난 미술 운동으로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현실의 모순을 파헤치며 인간의 탐욕과 부패, 잔혹함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인노첸티는 고전을 자본주의 빈부격차, 범죄, 어린이 성폭력이라는 주제를 그림책 위에 펼쳐 놓고 화려한 물질적 세계와 선량한 사람으로 보이는 어른을 무조건 믿지 말라고 조언한다. 어린이 성범죄는 실상 가까운 사람들, 혹은 친절하게 다가오는 사람이 주범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음식으로 즐기는 ‘살’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얘기하는 소윤경의 『레스토랑 Sal』(문학동네, 2013)이다. 자신의 책을 소개하는낯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 기회에 작업 과정을이야기해 보려 한다. 레스토랑의 이름이 ‘Sal’인 이유는 한국어 발음으로 ‘살’이고, 불어로 ‘sale [sal]’은 형용 사로 ‘추악한’이라는 뜻이 있고, 책 표지의 음식 덮개 위에 쓴 영어로 구원이라는 뜻을 가진 ‘salvation’의 앞글자이다. 사실 이 책은 아무런 원고도 스케치나 더미도 없이 무작정 한 달에 한 장씩 완성해 나갔다. 스케치 단계에서 타인의 얘기를 너무 의식하게 되면 자칫 본래의 싱싱함에서 멀어져 굳은 떡 같이 딱딱한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화가들은 때때로 매우 민감해서 무언가 의식에 짓눌리면 자유롭지 못한 감정에 빠져 실력 발휘를 못하고 헤매기도 한다. 그런 경우 좋은 작품이 만들어지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그로테스크한 스타일로 화면을 가득 채우는 그림책을 받아 줄 출판사를 만나기 어려울 듯했기에 독립 출판까지도 염두에 두었다. 그래서 아무도 의식하지 말고 일단 작업해 보기로 한 것이다. 미래의 어느 도시에서 한 여자아이가 엄마인지 보호자인지 알 수 없는 여인과 기묘한 레스토랑에 들어선다. 큰 홀에는 이미 화려한 손님들이 속속 자리를 잡고 음식을 주문하거나 기다리고 있다. 손님들을 자세히 보면 당시 유행했던 드라마 〈추노〉의 배우들, 영화 〈아담스 패밀리〉에 나올 법한 가족들을 그려 넣어 소소한 재미를 넣었다. 아이가 화장실 배수구에 낀 뚱뚱한 고양이를 꺼내 주려다 떨어진 곳은 레스토랑의 지하에 있는 거대한 기계실이었다. 그곳에서 심상치 않은 재료들이 혼합되고 있다. 더 깊은 안쪽 문으로 들어선 아이는 철창에 갇혀 있는 수많은 동물의 간절한 눈빛과 만나게 된다. 개와 고양이는 물론 새끼를 안고 있는 원숭이, 펭귄, 비둘기, 개구리, 곰 등 다양한 종의 동물이 식재료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석 요리사가 주삿바늘로 새끼 고양이를 찌르려는 순간, 어미 고양이가 요리사를 할퀴고 새끼 고양이를 물고 도주한다. 아이는 철창에 갇힌 동물들을 필사적으로 구출해 도망치려 하지만 모두 기계에 붙잡혀 암흑 속으로 떨어지고 만다. 아이가 눈을 뜬 곳은 포도주 잔을 앞에 두고 맛난 음식을 즐기려는 한 여성이 앉아 있는 테이블 위의 접시였다. 마지막 장면은 날카로운 포크와 나이프가 놓인 채 음식 찌꺼기만 남은 빈 접시. 즐거운 식사시간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레스토랑 Sal』은 원래 글 없는 그림책으로 하려 했지만, 그림이 완성된 후에 글을 썼다. 기본적으로 그림으로 스토리를 진행하는 터라 글은 레스토랑을 소개하는 수석 요리사 입장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훌륭한 요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가를 자랑스럽게 설명함으로 아이와 동물들의 시점과 대치시켰다. 전체적으로 세밀한 펜과 연필로 단색 톤을 그렸고 부분적으로만 색을 넣었다. 펼침 면과 만화적인 컷 등 다양한 화면 분할로 동적인 화면을 구성하였다. 『레스토랑 Sal』은 책으로 과연 나올 수 있기나 할까 하는 우려를 깨고 국내에서 보기 드물게 큰 판형으로 출판되었다. 『레스토랑 Sal』은 인간이 누리는 모든 물질적 즐거움 뒤에는 목숨을 희생해야 하는 동물들의 고통이 있음을 섬뜩하게 보여 준다. 인간의 탐욕으로 지구의 생명을 고갈시켜 아이들의 미래를 빼앗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로테스크한 판타지로 표현하였다. 최근 몇 년간 그림책은 주제와 소재의 폭도 넓어졌다. 이러한 과감한 시도를 받아들이는 출판사도 늘어났다. 독자들도 어린이 그림책에 담기 어려웠던 사회의 어두운 모순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만큼 그림책에 대한 시각이 성숙해져 가고 있어 그림책 작가로서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좋은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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