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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그림책, 경계를 넘다. -그림책에 빠진 어른들

월간 <어린이와 문학> 소윤경의 그림책읽기(2014년 12월호)

점심을 먹으러 간 아담한 식당, 벽 선반 위에 가지런히 그림책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림책을 보며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식당의 주인이 소장한 유럽의 예술적인 그림책들이다. 북 카페에서 새로 나온 감각적인 디자인 잡지나 신간 그림책을 보면서 차를 마시는 일들은 이젠 일상의 풍경이 되어 가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이 개봉되면 제일 먼저 달려가 보던 어른들, 만화 『20세기 소년』에 열광했던 독자들은 이미 중년이 되었다. 웹툰과 게임의 세계 또한 더는 어른과 어린이를 구분 짓지 않는다. 취향과 선택은 세대를 넘어 각자의 몫이 되었다. 이미 그림책도 아이의 정서적 발달과 부모와의 유대감을 위해 혹은, 교육적 목적으로 국한 지어져 있지 않다. 물론 아직 국내외 출판시장에서는 유아와 어린이를 위해 제작되고 부모와 가족 구성원이 아이와 함께 읽고 즐길 수 있는 그림책들이 대다수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국내에도 새로운 주제와 표현력을 보여 주는 창작 그림책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어 이것이 과연 어린이들이 볼 만한 그림책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작가가 지나치게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계를 표현해 어린이 독자를 소외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 제기도 나오고 있다. 이런 우려들은 드디어 우리 그림책 시장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하고 새로운 문화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하는 좋은 징조이라고 생각한다. 2000년대를 지나 현재까지 국내 창작 그림책은 가히 놀라운 수준의 예술적, 미적성장을 보였음에도 많은 독자는 아직도 그림책은 아이가 보는 책으로 생각하는 것이 지배적이다. 물론 그림책의 출발과 기저에는 ‘아이가 처음으로 보기 시작하는 책’이라는 점이 가장 큰 위상을 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림책 분야는 유아, 아동이라는 한정된 독자에게 갇혀 성인들에 의해 통제되기보다 더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독자의 나이와 취향에 따라 선택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어른들이 공감하며 보고 싶고, 미적으로 아름다워서 사고 싶은 그림책들도 존재해야 한다. 다양한 관점 안에서 그림책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논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최근 국내 출판시장의 악화일로에도 불구하고 창작 그림책들은 매년 300권 이상이 출간되고 있다고 한다. 이미 그림책 분야는 스테디셀러가 시장의 입지를 굳힌 상태라 신간 그림책들이 선전하기는 어려운 구조에 있다. 수요와 공급이 불균형을 이루는 상태이지만 그림책 작가들은 어느 때보다도 열정적으로 왕성한 작업을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만큼 작가들에게는 그림책이 예술의 한 장르로서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고, 작가로서 도전해 보고 싶은 영역이다. 우선, 이번 주제에 부합하는 그림책으로 전 세계의 어린이는 물론 청소년, 성인에 이르기까지 그림책 마니아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작가, 숀 탠의 『도착』(사계절, 2008)을 소개하고 싶다. 국내에 출간된 그의 다른 그림책 『빨간 나무』는 그림의 아우라만으로도 소장하고 싶은 그림들이며 심상의 이미지들을 판타지의 세계로 놀랍도록 잘 이끌어 낸 작품이다. 『도착』은 그간 내러티브와 문장의 운율에 중심을 두었던 그림책과 달리 이미지의 힘으로 불안과 공포, 고립감 등의 부정적이고 어두운 인간의 심리를 표현한 독보적인 그림책이다. 숀 탠은 회화적이고도 만화적인 스타일로 흐르는 듯한 드로잉과 거대한 공간감을 보여 주는데 이것은 아마도 작가가 사는 호주라는 땅과 풍광이 작가에게 이토록 강렬하고 풍부한 색감과 양감들을 부여한 듯하다. 숀 탠 특유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는 수증기 같은 구름과 광활한 지평선, 강한 빛에 의한 음영으로 표현한 낡고 쓸모없어진 파이프와 기계들은 그만의 기괴하고도 향수 어린 배경을 그려 낸다. 숀 탠의 홈페이지(www.shauntan.net)에 들러 작가가 작업한 풍경화를 보면 숀 탠이 얼마나 화가로서의 능수능란한 작품 특성을 가지고 있고 문학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사고는 그림책 작가에게는 그림을 잘 그려 내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부분이다. 『도착』은 마치 빛바랜 조부모의 사진첩을 보는 듯 연필로만 그려진 무채색의 그림으로 이야기를 이어 가는 글 없는 그림책이다. 면지에서는 이민자들의 증명사진들이 나열되어 있다. 고통스러운 과거로부터 가족과 떨어져 망명을 선택해야 했던 이들이 낯선 땅에서 겪는 혼돈과 정착을 해 나가는 과정들이 컷 그림을 따라 계속 이어진다. 독자는 그 나라의 언어를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 되어 낯설지만 어쩐지 친숙한 구석도 있는 신비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시작을 해 나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속에는 이민자들 간의 따뜻한 연대의식이 새 삶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전해 주고 있다. 그림의 디테일은 물론이고 방대한 스케일은 한편의 SF 영화를 연상시킨다. 실제 숀 탠은 애니메이션, 일러스트레이션, 그래픽 노블 등 모든 시각 문화 전반에서 경계 없이 작업하고 있는 작가이고 그의 작품들은 연극, 애니메이션, 영화로도 제작되고 있다. 『도착』은 사실주의적인 묘사와 판타지 세계를 조화롭게 구성하였고,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공존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다른 이민자들의 과거 기억들도 중간 중간 배치되어 과거로 시간의 흐름을 역행하기도 한다. 페이지 수도 기존의 그림책보다는 그래픽 노블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많다. 그래픽 노블은 서구의 만화소설로 만화를 예술의 또 다른 형태로 만드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해 왔다. 유럽과 영미권에서는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서점 어디를 가나 그래픽 노블이 늘 인기 코너이다. 사실, 나는 그래픽노블을 유럽에서 처음 접했을 때의 놀라움을 잊지 못한다. 흑백만화의 단조롭고 작은 판형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그래픽 노블의 만화 컷 하나하나는 순수회화에 못지않은 수준을 보여 주고 있었고 내용 역시 파격적인 주제들을 표현하고 있었다. 마치 현대회화로 된 영화를 보는 듯 한 느낌이라고 할까. 숀 탠의 『도착』은 그림책과 그래픽 노블의 경계를 오가는 작품으로 자신의 가족사이기도 한 호주 이민사를 따듯한 시선으로 담아낸 걸작이다. 4년의 작업 기간 동안 방대한 작업량으로 만들어진 그림들을 볼 때마다 작가로서의 지난한 노고에 경탄을 금할 길이 없다. 다음에 소개할 책은 아이완의 『구멍』(마루벌, 2005)이란 그림책이다. 아이완(본명 황은주) 역시 만화와 그림책이라는 영역을 오가며 일러스트레이터로서 활동 중인 작가이다. 그러고 보면 만화와 애니메이션, 그림책의 영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가는 작가들이 유독 성인독자층에 호응을 얻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만화가 이루어 온 표현력과 서사가 그림책에 녹아들면서 어린이와 성인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연성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숀 탠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은 볼로냐 국제 어린이 도서전과 앙굴렘 국제 만화 축제, 양쪽 분야에서 모두 초대됐다. 색연필로 정교하게 그려진 그의 그림들은 차분하면서도 몽환적이고, 나른하고 몹시 우울하다. 하지만 작가가 그림을 그리면서 침잠되었을 시간, 생명에 대한 연민과 공허한 우주의 풍경들은 자신을 구원하고 싶을 만큼 달콤한 시간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작가들이 자신의 책상에서 보내는 고요한 노동의 시간이 본인에게는 가장 평화롭고 소중하단 것을 잘 알고 있다. 내용을 보면 소년은 죽은 동물들의 영혼을 우주로 여행시키기 위해 컴퍼스로 구멍을 만드는 일을 한다. 동물들의 영혼은 구멍을 통해 우주로 떠나가고 그들은 눈 없는 소녀가 있는 행성을 지나 마음을 위로받고 영원한 여행을 떠나간다. 그녀는 마음의 눈으로 그들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는 존재일 것이다. 너무 많은 구멍을 뚫어 버린 소년은 발을 헛디뎌 지구의 거리로 떨어지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동물원에서 숨을 거둔 코끼리의 영혼은 구멍이 없어 하늘을 온종일 배회하고, 눈먼 소녀는 행성의 띠에 홀로 앉아 누군가 지나가기를 한없이 기다린다. 책을 덮으며 가슴이 먹먹하고 슬픔이 밀려온다. 청록색의 우주에는 고독한 존재들이 마치 별처럼 유영하고 있다. 이 작품은 단편 애니메이션을 그림책이라는 그릇에 담은 듯 한 플롯을 가지고 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공부한 학도에게 보이는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첫 작품 『워터 보이』 역시 몽환적 감성이 충만한 작품으로 작가의 고요한 침잠의 세계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소장가치가 충분하다. 2011년 출간된 유준재의 『마이 볼』(문학동네, 2011)은 아예 성인이 된 아들의 시점에서 출발해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전개해 간다. 말하자면 그림책에서 화자가 어른인 셈이다. 따스한 그림에 이끌려 아이와 책을 펼친 독자라면 아버지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성인의 시점으로 보면 보편적인 아버지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하는 차분한 내레이션을 느끼게 된다. 작가의 시대의 아버지들은 가장으로서 성실하지만 무뚝뚝하고 표현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유일하게 야구를 통해 부자는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매개를 가질 수 있었다. 처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간 야구장에서 아이는 가슴벅찬 희열을 회상한다. 아이는 소년으로 자라고 성인이 되어 더는 아버지와 야구 얘기를 하지도 캐치볼을 하지도 않지만, 그 시절 아버지와 캐치볼을 하며 세상을 향해 “마이 볼!”을 외쳤던 순간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그것은 야구공에 실어 던져 주고 싶었던 아버지의 사랑과 용기의 메시지였으리라. 이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작가가 세상에 없는 아버지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을 담아낸 자전적 에세이 같은 그림책이다. 『마이 볼』은 콜라주와 판화 기법을 혼용해 풍부한 회화적 감수성을 만들어 낸 작품이다. 그 시절 야구팀의 로고와 선수들의 이름이 지금은 작가 자신처럼 아버지가 된 어른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특히 한국시리즈에서 베어스와 라이온즈의 투수와 타자가 맞선 장면은 긴장감의 최고조를 보여 주듯 글이 없다. 이 장면은 배경의 인물들과 중심인물을 각기 다른 판화 기법(고무판과 실크스크린)을 이용해 거리감을 준 것으로 화가로서의 농익은 기량을 보여 주고 있다. 두고두고 아버지가 그리운 날들에 꺼내 보게 될 그림책이다. 우연히 티브이를 보다가 호스피스 병동에서 임종을 앞둔 환자들에게 읽어 준다는 그림책을 알게 되었다. 2011년 출간된 조원희의 『혼자 가야 해』(느림보, 2011)는 죽음에 대한 성찰을 아름답고 성숙하게 다뤘다. ‘죽음’이라는 소재를 무겁고 부정적으로 다룬 것이 아니라 특별한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익숙하던 이곳에서 또 다른 저곳으로 가는 것일 뿐이라며 우리 모두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함께 걷던 길을 혼자 걷고 인도자가 이끄는 대로 영혼을 상징하는 붉은 연꽃이 흩어진 강을 배를 타고 떠나는 강아지의 마지막 눈빛은 처연해서 더욱 가슴 뭉클하다. 석양이 물드는 강은 죽음으로 가는 마지막 여정에 서정적인 그리움을 담아낸다. 이 그림책은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환자와 가족들에게 큰 위로를 준다고 한다. 작가는 반려견의 죽음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작업해 나갔지만, 독자들은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생의 한 부분을 아름답게 받아들이고 생의 시간을 보다 더 살아 있음으로 보낼 수 있는 마음의 위로를 얻어 간다. 앞으로는 그림책이 조부모가 손주들에게 읽어 주는 것뿐 아니라 자신을 위해 누릴 수 있는 독서문화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림책이 전 세대에게 연결되어 있는 공동의 정서들을 연결할 수 있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그릇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서재에 취향에 맞는 그림책들을 소장하고 있는 성인 독자들이 늘어가고 있듯이, 어른들의 세계를 살아가도 그림책을 읽을 수 있는 감성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 멋지게 보이는 시대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 아이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 개인의 박물관 속에 꼭 자신만의 그림책들이 들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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