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속한 시대의 초상 _박영택 / 금호갤러리 큐레이터

1 김포공항에서 서울 도심으로 들어오는 길에 만난 차창 밖의 난삽하고 무절제한 풍경은 우울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간간이 비가 그런 기분을 더욱 고조시켜 준 그 날, 필자는 우중충한 색조로 채색 된 건물들과 상점의 간판, 지나는 행인들, 화장기 짙은 젊은 여자들의 그 한결같은 패션과 표정을 몇 달 간의 부재 후에 새삼스레 관찰하고 있었다. 차 안에서 나는 희망도 활기도 상실한 우리 시대의 표정들을 우울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문화가 없는 나라 · 시대란 생각이 들었는데 이는 가치도 철학도 없다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삶에 대한 개인들의 정체성이 없다는 얘기가 아닐까. 당연히 좋은 작가 / 그림이 없다는 얘기이리라. 진정한 예술가의 부재, 그리고 우리 사회의 상업주의와 한탕주의, 갑갑함, 옹졸함, 보수성을 떠올린다. 진정한 문화와 예술이 실종되고 날림과 가짜와 작위, 화장기가 판치는 현실 속에서, 미술판에서 필자는 무엇보다도 각 개인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정체성을 통해 나름의 근성을 지닌 예술가로서, 그 공인으로서의 책임의식을 지니고 이 화단에서 착실히 버텨나갈 수 있는 의지와 삶의 정신을 지닌 작가들을 만나고 싶다. 참다운 작가란, 엄격한 이성과 합리성(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합리적인 인간이란 다름 아니라 계산 가능한 사고와 행동을 하는 인간이며, 그만큼 효율적이고 통제 가능한 인간이라는 소리다)이 요구되며 숨 막힐 듯한 규제와 제도, 이데올로기로 조여진 이 근대적 지배체제의 삶을 살아가는 순응적인 대중들을 대신하여, 금기와 통제의 벽을 깨는 일탈의 의지를 몸소 실천하는 운명을 스스로 용인한 사람들이다. 정상이라고 간주되는, TV에 처박힌 코드화 된 삶, 미치지 않고는 도저히 탈출할 수 없는 삶의 벽을 깨는 진정한 용기와 자유를 지닌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이 땅의 무수한 화가들은 그래서 쟁이에 불과하다. 우리 현실은 예술 / 미술은 없고 오로지 특정한 습관과 관념이 강제하는 제도가 고착되어 있다고 보며, 거의 그 틀 내에서 누가 누가 잘하느냐 하는 기량의 극대화 및 누가 더 그럴 듯하게, 이쁘장하고 매력적이며 감각적으로 장식해 내느냐하는 문제에 골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 / 아티스트는 드물고 거의가 쟁이나 인테리어디자이너, 장식가들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그들은 그림을, 예술을 오로지 성공의 수단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화단 역시 성공이 오로지 유일한 목적이 되는 이 사회의 천박한 자본주의적 경제논리를 그대로 수용해 내고 있다. “오늘날의 삶은 음험한 현실과 들뜬 정서들, 억압적인 문명과 가짜의 의식들이 켜켜이 쌓여있어, 거기에 진상은 묻히고 진정성은 메말라 가고 있는 바, 그럴수록 우리의 ‘미술’은 그 타락한 세계 속에서 여전히, 집요하게, 가려진 진의를 캐내고 숨은 진실을 밝혀내며 그것들을 아름답고 힘있게 키워내야 할 몫을 자긍하지 않으면 안된다.”

2 소윤경은 1970년생이니까 무척 젊은 작가이다. 그는 90년에 입학을 했고, 졸업한 뒤 몇 해를 작업실에서 신물 나도록 지겹고 권태로운 삶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필자는 이 작가가 지금까지 작업에서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거나 새로운 미술개념 혹은 독특한 실험적 결과물을 만들어 낸 젊은 작가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보다는 앞서 언급한 기질, 정서 그리고 자신의 현재 상황 속에서 회화의 기능을 길어 올리는 쪽에 골몰하고 있는 동시에, 동시대의 젊은이들이 지니고 있는 대중문화에 대한 향유와 기호를 투영하여 그리는 쪽에 가깝다고 본다. 비교적 평범한 그림이지만, 이런 시대에 회화가 무엇이고 동시대의 자기 또래 젊은이들의 삶에 대한 시선, 일반인들의 삶과, 이 사회와, 부재하는 문화와, 가치의 왜곡과, ‘꽝’인 사회의 초상을 예리하게 관찰하면서 화폭에 옮기는 그 과정과 태도, 삶에 호감이 가고 그런 의미에서 관심이 간다. 소윤경은 조그만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며 산다. 이 젊음, 청춘을 갑갑한 공간 속에서 보내야 하는 그 천형(天刑)같은 고독과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다. 주위를 둘러봐도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공간에서 살기 위해, 자신과 가족을 위해 은둔자처럼 살고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자기처럼 그림 그린다는, 이 비생산적인, 인생과 사회에 도움이 안되는, 비참하게까지 생각되는, 가난한 룸펜 화가로서의 자신이 한심하게 생각되고 삶이 지나치게 권태로 가득하다고 본다. 그의 그림에는 무미건조한 동시대의 젊은이들의 초상이 오버랩 되어 있다. 뽀족한 수 없이 다들 뭉툭하게만 사아가고, 제자리에서 제 밥그릇 앞에서 순응적으로 사는 젊은이들, 아니 모든 이들의 초상이 이 작가의 최근 그림에 박혀있다. 그만큼 자아에 몰두해 있는 괴로운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어떻게든 쇼킹하고 튀려는 쪽으로 몸을 들이 밀다가도 곧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 일탈과 반항에 따른 처벌과 금기를 두려워하면서 이탈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의 비겁함에 화를 내면서, 그 불감증 세대들(이른바 신세대들일 수 있는), 혹은 오늘날 우리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의 희망도 문화동 철학도 없기에 오로지 쾌락적, 도락적 욕망의 문화에 탐닉하는, 그런 모습도 그려지고 있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에게는 크게 결락된 부분이 커다란 구멍처럼 남아 있고 그것을 메우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며 심한 공복감에 시달리고 있다. 이 도시를 익숙하게 살아가는 나와 사람들, 굶주린 도시인들을 위로할 각종 기괴한 문화, 유흥적 시스템· · · 그러나 우리의 갈증을 풀어 줄 분출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소윤경. 러브 카페. 1994. 과슈. 100 X 100

나는 소윤경의 그림에서 이 따분하고 권태롭고 문화가 없는 우리 시대 사람들의 풍속과 젊은이들의 초상, 그 속에서 시달리는 이 작가의 사유의 혼돈과 멀미를 본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의 삶은 가짜와 작위뿐인 문화의 공간이고 그것은 정상적이 아니다. 정상이 아닌 가짜의 세계를 우울하게 아웃사이더로서 관찰하면서 소윤경의 그림은 시작된다. 도시에서 자라 도시에서 죽을 우리들의 운명은 결락과 공복감, 권태와 갈증, 고독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메마른 사막 같은 삶이고 이는 예민한 예술가, 화가들에게는 더욱 심하게 다가오는 삶의 비애이고 서러움일 것이다. 이 아웃사이더, 탈주를 꿈꾸는 진정한 아티스트들은 도회적 삼의 속성과 그 현실에 예민하게 접촉한다. 그는 대학시절 민중미술권 선배들의 여향 아래 있었다. 이후 그는 점차 그 그림들이 짜증나고 지겨워지면서 마음이 ‘해피’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림들이 한결같이 일러스트레이션과 같다는 생각, 동감은 하는데 회화라는 것이 그렇게 한번 봐서 즉각 알아차리고 인지되는, 질려 버릴 성질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과 회의가 생기면서 자연스레 스스로 그림의 틀을 추구해나간 것으로 이해된다. 그림은 무엇보다도 회화성이 있어야 하며, 그래서 기술적인 차원에서 좀 더 개성적이며 질적 수준을 담보해야 한다는 개인적인 소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졸업 후 그는 작업실에서 박혀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몇 년 후 적지 않은 동료들이 그림을 쉽게 포기하고 만화, 일러스트레이션, 영화 등으로 빠져 나갔으며 자신처럼 엉덩이 붙이며 작업실에 처박혀 있는 동료들은 거의 없는 상황이 왔다. 100여명의 졸업생이 배출되면 남학생들은 그 군대식 서열문화에 순응해 어느 정도 살아남고, 거기에서 전적으로 소외되는 이른바 비주류의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은 완전히 찬밥이 되는 게 우리네 실정이다. 남학생들은 그림을 성공의 수단, 밥그릇이 달린 문제로 달려들어 돈독한 선후배간의 연대감으로 뭉치는 데 반하여, 연대감도 없고 관심권에서 벗어난 여학생들의 경우에는 각기 개별적으로 버티면서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붓을 놓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기적 같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렇게 버텨내는 여자들에게서 독특하고 좋은 그림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유행이나 특정한 세력으로 과시되는 화단의 중심에서의 소외가 오히려 각 개인의 성향과 기질, 정서를 파고드는 그림의 가능성을 맛보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소윤경도 그런 경우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소윤경은 작업은 무엇보다도 자기가 관찰하고 느낀 부분, 혹은 꿈꾼 장면이나 상상력을 동원되어 재미있고, 그러면서 영화적 각색과 만화적 구성에서 보게 되는 스토리의 전개와 한 순간의 찰나적인 인상적 부분들이 응축되어 있다. 필자는 그의 그림에서 영화와 만화, TV를 유일한 오락과 문화의 전부로 받아들이고 살아 온 젊은 세대의 특징적인 미적 감각과 사유를 본다. 그러니까 ‘대중문화의 스펙터클에 완전히 감염된 세대’, 특히 이 작가만의 거의 육체적인 친화감에서 발원하는 것 말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그림은 미술중심주의와 미술에 대한 순결주의적 경사를 과감히 벗어 던지고 있다. 그는 그의 동세대가 그렇듯이 특히 오늘날(이른바 ‘문화전쟁’, ‘문화의 시대’로 불리는 현재) 영화, 만화, 팝송, 가요, 재즈, 비디오, 거리문화 등의 전방위적인 대중문화를 그 누구보다도 감각적이며 육체적으로 이해 · 향유 · 수용하는 작가라고 본다. 그리고 대중문화에 대한 ‘매혹과 거부감(반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다분히 문화적 지형 자체의 변화와 변모에 따른 미술적 대응 혹은 자연스런 만남으로도 이해된다.

소윤경. 위대한 은둔자. 1995. 천 위에 목탄. 158 X 117

무엇보다도 그의 그림은 만화적이고 영화적이다. 그 만화적이라 함은 불길이 치솟는다거나 물이 흐른다거나 번쩍거리는 효과를 흡사 만화에서의 표현어법을 그대로 옮겨 쓰고 있는 점이다. 화면의 합리적 배열과 원금법이 완전히 무시된 채 아동화에서 볼 수 있는 중심 되는 대상이 크게 부각되는 장면연출에서 증명된다(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이 도시의 풍경은 온통 뒤죽박죽이고 불길이 치솟거나 어지러운 회로와 파이프와 전선들이 뒤엉켜 있고 곳곳이 공사 중이며 소음으로 가득 찬 혼돈의 모습이다). 또한 화려하고 선명한 색채감각이 눈에 띄는데 이는 사물을 지시하는 종속적인 색이 아닌 연출된 색채이고 다분히 영상적인 색채관이다. 이 작가는 자신이 보고 관찰한, 체험한 삶을 생생하게 보관하고 싶은 욕망으로 영상적이고 만화적인 어법을 동원하고 있다. 영상매체 우위의 시대와 회화의 한계와 위기가 거론되는 시대에 회화를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평면화화가 지닌 타 장르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이 오히려 그림을 그리게 한다고 말한다. 자신은 손, 그 노동과 육체적 감각과 정신을 받아 그려지는 회화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정신적 공간을 그려내는 데 있을 것이다(인간이 가진 육체와 정신의 움직임의 흔적을 직접 드러내는 능률적인 수단인 회화는 그런 면에서 회화의 위기가 주창되는 시기의 경박함을 벗어나 변화와 새삼스런 기능의 모색에 직면했을 뿐이다). 마음의 분위기와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 회화가 가장 적합하다는 주장인데, 그런 면에서 이 작가는 서정성과 낭만성, 예술을 통한 감동과 울림, 소통에 기대를 거는 작가이다. 사실 예술이란 사람의 마음을 잡아끌어서 진실과 아름다움의 언저리에 앉히는 것이지 않은가? 또한 화가란 능숙한 그림솜씨와 테크닉을 기본으로 해서 사람들에게 어떤 가치를 전해 주고자 고민하는 자들이 아닌가? 소윤경은 당대,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감정과 정신의 상태를 표현하고 싶어 한다. 아울러 한 인간이 한 시대를 살면서 표현하고 싶은, 표현할 수 있는 정신적 이슈와 감정 상태를 해명하고 싶어 한다. 이 타락한 시대, 문화가 부재하고 당연히 철학과 삶에 대한 정신적 비젼을 상실한 시대에 그림이 해야 될, 작가가 해양 될 의무와 책임이 이 자리에서 불거져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그림은 자기 존재의 확인이고 그것은 하나의 치유와 보상의 행위일 수도 있다.

소윤경. 실험실. 1995. 화포 위에 유채. 112.1 X 145.5

4 소윤경의 작업을 일별해 보면 우선 화가인 작가 자신의 심리적·정신적 상황이 표명된 그림, 그가 살고 있는 현실적 삶의 공간을 관찰한 장면들, 그리고 동시대 젊은 세대들 혹은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풍속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시각이 드러난 그림, 아울러 기억과 꿈,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시달리던 경험들의 초상이다. <이 시대는 화가를 열 번도 넘게 죽인다>는 모노톤의 작업은 화가를 단순한 수공업자나 장인 혹은 환쟁이로 보는 왜곡된 화가상, 즉 자신에 대한 주위의 시각 혹은 내재화된 자기 존재의식에 대한 반응이다. 화실 공간에서 썩어가는 존재에 대한 비애스러움, 그러나 화가로서의 자신의 꿈과 주체성을 고수하고 싶어 하는 열망, 이 타락하고 음험한 시대에 화가의 위축에 대한 상념같은 것들이 부유하는데, 그 안에는 자기 존재감의 확인과 함께 축소되고 싶지 않다는 소망이 개입되어 있다. 늘상 편두통에 시달리는 자신의 초상이 섬찟하게 그려져 있는 <편두통>이란 작업은 지끈거리는 머리 속에서 뇌수가 누렇게 쏟아져 나오는 것을 손바닥으로 받고 있는 장면이다. 이 그림의 배경에는 머리 속 회로를 연상시키는 온갖 선들이 복잡다난하게 연결되고 엉켜있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매우 복잡한 속을 지닌 머릿속, 또는 도시의 모든 구조들, 삶과 감정과 정신의 도해 같은 인상을 준다. 그는 이 사회현실의 모든 것들에 대해 이렇듯 편두통에 시달릴 정도로 열 받아 한다. 제대로 되지 못하고 바보같이 굴러가는 모습들, 짜증을 동반하는 모든 현상들, 폭력적이고 무례하고 천박한 사람들, 말초적이고 쾌락적이고 졸부적인 문화들, 그 속에서 오로지 탐욕과 돈과 성욕만이 횡행하는 우리 자본주의의 모습에 대해, 그 불감증에 중독된 ‘후까시’들에 대해· · ·, <블루를 보고>는 영화 블루를 본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현실의 억압과 중압감을 벗어나 그 비현실적인 공간·스크린 속에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면서 영화의 분위기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 도취된 모습인데, 이는 현실을 망각하는, 망각하고 싶어 하면서 그 대리체험의 자극에만 매몰되는 젊은 세대들에 대한 은근한 조롱도 숨어 있다. 그가 주로 영화, 전자오락, 러브호텔(섹스), 날개, 짐승의 모습을 즐겨 그리는 이유는 아마도 현실이탈과 도취에 취한 도시인의 속성이 깔려 있는 듯하다. 이 작가의 관찰력과 기억력을 필자는 호감 있게 보고 있는데, 특히 어떤 특정한 장면에 대한 자기 나름의 느낌을 형상과 색으로 표현하는데 있어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동네에서 그가 만나 인상 깊게 본 사람들의 모습은 희극적이고 재미있고 날카롭다. 희한한 복장을 하고 오토바이를 몰면서 짜장면을 배달하는 양아치차림의 아가씨, 마을에서 어깨노릇을 하는, 마도로스 모자와 파이프를 물고 희색 빽바지를 입은 중년의 사내모습, 가스통 배달꾼, 오토바이 폭주족들이 그렇다. 보자 것 없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눈에 튀는 차림과 복장을 통해 자기 존재를 과시하는 그런 속성이 불러일으키는, 생경하나 이해되는 천박함, 그러나 어쩐지 연민을 자아내는 모습에 대한 관찰이기도하다.

소윤경. 황금투구. 1996. 천 위에 목탄. 117 X 158

<러브카페>라는 작업은 대낮에도 북새통을 이루는 한 러브호텔의 장면이다. 붉은 색을 모노톤으로 조율해 그린 이 그림은 그 색조에서 홍등가의 조명 내지 도색적이고 음란한 정감을 부여하고 있다. 창문에서부터 흘러넘치는 흰색 물감덩어리는 아마도 대낮부터 벌이는 정사로 인한 정액이리라. 그 허망한 정사와 부질없는 사정, 배설에 대한 관조적 시각은 어느 면에서 우리 사회의 천박하고 쾌락적인 섹스문화에 대한 우울한 관찰이리라.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이 도시에서 사는 오늘날 젊은 세대는 한쪽으로 덫처럼 놓인 감각과 자극적인 쾌락의 물길에 자신을 탕진하고 허망한 정사와 불감증에 걸린 사랑의 세례를 받아내는, 그야말로 불행한, 희망 없는 세대일 수 있다. 오로지 욕망만을 위해 헤매는 도시인들의 텅 빈 가슴에 그의 회화가 무슨 위안과 자극이 될까. 문화와 자기정체성을 상실한 타락한 시대와 세대의 풍속을 그리는 작가는 아마도 자신의 고통과 실존적 체험에 비례해 힘을 얻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 도시에서의 고독과 권태로운 삶을 보다 더 견뎌낼 수밖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그것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리라. 그러난 그것이 바로 작가의 의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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