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세상을 그리다> L부인과의 인터뷰 2018.06.29_한국일보


엣눈북스 제공


L부인과의 인터뷰

홍지혜 지음

엣눈북스 발행∙52쪽∙1만6,000원

L부인은 평범한 늑대이자 전업주부다. 한때 자유롭게 들판을 달리는 유능한 사냥꾼이었다고 한다. 결혼 후에도 한동안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아이를 낳은 후 일을 그만두었다. 강의 요청이 줄곧 들어왔지만 아이를 돌봐 줄 사람이 없었다. 1, 2년이 지나자 강의 요청마저도 끊겨버렸다. 남편이 출근하고 딸아이를 등교시키는 정신없는 아침이 지나면 L부인은 쌓인 집안일을 시작한다. 그녀에게 가사노동이란 매일매일 끝도 없이 잔해를 치우는 일 같다. 먹잇감을 찾아서 악을 쓰고 쫓아가면 되는 사냥과는 다른 일이다. 결혼 전에는 취미로 여기저기 여행 다니길 좋아했던 그녀지만 지금은 그저 평범한 엄마로서 세 가족이 행복한 것에 만족한다. L부인이 집안을 돌아다니며 깜박하고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고 있다. 어느새 화살을 집어 든 L부인은 어딘가로 있는 힘껏 활시위를 겨눈다. 화살에 맞아 박살 난 거울 파편 속엔 한 여성의 얼굴이 비친다. 깨진 거울 뒤로 그녀가 떠나온 사냥터가 보인다. L부인이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간다.

전래동화에서 으레 음흉한 늑대는 남성으로, 약삭빠른 여우는 여성으로 비유되곤 한다. 그러나 그림책 ‘L부인과의 인터뷰’에서 주인공은 야생에서 사냥을 하다 결혼 후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늑대다. 사냥터란 자신의 능력을 실현하는 사회와 직장을 말하는 것이리라.


엣눈북스 제공


세상은 늑대들의 당연한 희생에 익숙해져 있다. 위대한 모성을 운운하며 그 희생을 찬양하고 노래하지만 결코 짐을 나눠지려 하지는 않는다. 미혼 여성 늑대들에게 선택지는 세 가지 정도이다.

결혼을 하고 독박 육아와 가사노동에 매몰되어 시간이 가 버린다. 십중팔구는 사냥터에서 낙오될 것이다. 사냥터에는 돌아올 늑대들을 위한 자리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비난받지는 않는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단지 낮아지는 자존감과 우울증에 맞서 싸워야 할 뿐이다. 두 번째로는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초인처럼 사냥도 하고, 가사일과 육아까지 해내는 슈퍼맘을 선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장기간 생존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사냥과 육아 사이에서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아이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릴 수도 있다. 마지막 선택지는 결혼하지 않고 사냥터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제도 바깥에서 아무런 제재도 보호막도 없이 외로운 늑대로 홀로 살아가야 한다. 오직 자유만을 허락해 준다.


고작해야 이것이 현재 미혼 늑대들에게 주어진 선택지의 전부이며 현재 상황이다. 지방 선거가 끝나고 거리마다 당선인들이 감사의 플래카드를 걸어 두었다. 사진 속에서 호탕하게 웃고 있는 남성 정치인들은 선거 때마다 여성들이 마음 놓고 아이를 낳고 일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공약을 너도나도 내걸었던 것 같다. 진보적인 당이 우세했다고 하지만 여성 정치인 비율은 소수에 불과하다.

젖먹이 아이와 함께 모유 수유를 하며 의회에 참석하는 외국 여성 정치인들이 해외 토픽에 소개되었다. 직장에 아이를 안고 출근하는 아버지들도 나온다. 한국 사회에선 육아휴직을 내고 육아를 전담하고 있는 남성들이 늘고 있다지만 아직까지는 이채롭게 바라본다.

사냥터의 문화와 규칙들이 바뀌어야 한다. 효율적이고 공평한 사냥을 위한 조율이 필요하다. 벌판을 종횡무진 달리던 늑대들의 구슬픈 포효소리가 오늘 밤도 아파트 숲에서 메아리 친다.

소윤경 그림책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