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그림책, 세상을 그리다>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 2016.11.04_한국일보


난개발로 산에서 쫓겨나 서울로 내몰린 멧돼지 가족이 동족들을 위해 서울에서 지혜롭게 살아남는 법에 대해 집필한다. 보림 제공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

권정민 지음

보림 발행ㆍ20쪽ㆍ1만2,000원

가을철이면 월동준비를 앞두고 먹을 것을 찾아 도시에 나타난 멧돼지들이 뉴스에 자주 출연한다. 방향을 잃고 질주하는 이 불청객들에게 혼비백산한 채로 쫓기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투우 경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결국, 경찰들이 쏜 총에 맞고 누운 멧돼지 사체를 확인하는 것으로 해프닝은 끝이 난다.

권정민 작가의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는 난개발로 인해 산에서 쫓겨난 멧돼지 가족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기 위한 사투(?)를 유쾌 발랄하게 기록한 그림책이다. 책 표지를 열면 책상에 앉은 멧돼지 한 마리가 뭔가를 적고 있다. 동족들에게 자신의 도시 이주 경험을 쓰고 있는 것이다.

멧돼지 가족들은 엉겁결에 서울이라는 도시로 내몰렸다. 어디가 어딘지 모를 낯선 도시는 이들에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위험천만하고, 배고프며, 심지어 이유 없이 쫓기는 신세가 되기까지도 한다. 시급한 것은 어린새끼들을 데리고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 반드시 집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담담한 문체의 생존교본은 주인공 멧돼지의 절박한 상황과는 묘한 대조를 이룬다.

대략적인 지침들은 이런 식이다. 하루아침에 집이 없어져도 당황하지 말고 새 집을 찾아 나설 것, 이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아닌 것에 감사할 것, 먹을 수 있을 때 충분히 먹어 둘 것, 새로운 동네에 왔으면 분위기를 파악할 것, 수상한 녀석들이 나타나면 일단 피할 것. 그림 속에서는 청계천, 광화문 등 실제 서울이 배경이 되고 있다. 작가는 주인공 멧돼지의 표정과 동작을 익살맞게 그려냈다. 절대 절명의 심각한 상황에도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현대 건축과 토목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매일매일 지도를 바꿔 나간다. 자고 일어나면 산이 통째로 깎여 나가고, 바다가 육지로 메워지고, 강이 멈춰 선다. 하지만, 지도상에 표시된 몇 평, 몇 킬로미터라는 치수로는 측정 되어지지 않는 값이 있을 것이다. 과연, 그곳에 살던 생명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아무렇지 않게 깔아뭉개고 절단 내버린 곳에서 아이를 키우고 이웃들과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흩어졌을까? 낡은 집들이 헐린 자리에 지어진 마천루 같은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 편히 살고 있을까? 그림책을 보는 내내 마음이 짠한 것은 멧돼지들의 모습이 오늘날 도시 서민들의 서글픈 자화상과 닮아있어서 이다.

소윤경 그림책 작가












コメント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