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세상을 그리다> 여든, 꽃 2018.09.21_한국일보


책마을해리 제공


여든, 꽃

김선순∙이대건 지음, 이육남 그림

책마을해리 발행∙30쪽∙8,500원

여든한 살의 시골 할머니가 그림책을 냈다. 전북 고창의 책 마을 학교 4학년 김선순 할머니다. 작가는 열아홉 나이에 시집 와서, 농사 짓고, 다섯 자식 낳아 키우며 평범한 시골 아낙으로 살아왔다. 글을 써 본 일도 그림을 배운 적도 없지만 책 마을 학교에서 날마다 쓰고 그려 4년 만에 어엿한 그림책 작가가 되었다. 누구나 40세가 넘으면 책 한 권을 낼 만한 인생의 이야기가 쌓이기 마련이라고들 하지만, 팔순의 나이에 그림책을 냈다는 건 주변 사람들의 인정과 도움이 없었다면 이루어지기 어려웠을 일이기도 하다.

그만큼 특별한 무엇이 이 그림책 속에 담겨 있는 것일까? 할머니의 그림책은 흔한 하드커버 표지도 아니고 언뜻 전시 팸플릿 같은 모양새인데 가격도 저렴하다. 천천히 책장을 넘기자 화려한 색채와 순진무구한 필력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평생 곁에 두고 봤던 꽃, 나비, 새, 동물과 열매가 주인공이다. 해마다 피어난 꽃들과 키우던 동물들은 할머니의 지친 일상 속 작은 위안을 주는 좋은 벗들이었으리라. 꽃들 위를 사이 좋게 나는 한 쌍의 나비, 꽃나무 속에서 수줍게 노니는 새들, 익살스런 사람들 표정이 정겹기만 하다. 책 속엔 일찍이 부모를 여읜 작가를 엄마처럼 키워 준 큰언니에 대한 고마움과 몇 해 전 사별한 남편에 대한 애틋함, 보고 싶은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이 엿보인다. 그러나 그 모든 아픔도 그리움도 초월한 시선이다. 마치 평생 일궈 온 농사일처럼 살뜰히 키워 낸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다. 형광사인펜으로 투박하게 그린 그림은 과감하고 순박한데 오늘날의 민화첩이라고 하면 의미가 통할까? 좋은 시절에 태어나 그림 공부를 했더라면 김 할머니는 큰 화가가 되셨을 게 분명하다.


책마을 해리 제공


진흙밭 연꽃처럼 살은 날은 늘 함박으로 피었는데

벚꽃 그늘에 살았네, 연꽃처럼 뿌리내리고 흘러왔네.

호랑 호랑 나비처럼 오소,

나는 백 가지 꽃으로 피어 기다리니

만 가지 꽃으로 피고 피어 기다릴 테니.

80평생이라는 비탈 위에 멈춰 서서 돌아보니, 일생이라는 산에 거의 다 오른 듯하다. 누구 하나 고단한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눈여겨봐 주지는 않았다. 작가는 그림책이라는 그릇에 오롯이 짧지 않은 생의 환희들을 담아냈다. 이 성취가 고맙기 그지없는 것은 세파를 견뎌 낸 고목처럼 팔순 노인이 건네는 인생에 대한 덤덤한 위로이기 때문이다. 지나온 굽이굽이 능선을 바라보며 생은 힘겨워도 생명들은 때가 되면 저마다 꽃을 피운다고 말하는 듯하다. 기다리고 기다려 여든에 핀 꽃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고 아름답다. 가을 아침, 학교를 가기 위해 마당에 나온 할머니가 굽은 허리를 펴고 한마디 하신다.

“워메, 날씨가 참 거시기 허네. 아따, 참말로 겁나게 이쁜 꽃이 펴 부렀네잉.”


소윤경 그림책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