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세상을 그리다> 나는 봉지 2017.07.13_한국일보


사람들 손에 들려진 봉지. 내용물을 건져내면 버려진다. 그러나 봉지의 삶은 그것 뿐일까. 웅진주니어 제공


나는 봉지

노인경 글ㆍ그림

웅진주니어 발행ㆍ72쪽ㆍ1만2,000원

값싸고 흔한 것, 얇지만 힘세고 튼튼한 것, 편리해서 매일 쓰이지만 하찮게 여기는 것, 바람에 날리는 가벼운 존재 같은 것.

어느 날 작가는 비닐봉지를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넣다가 문득 생각에 잠겼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멀쩡한데 이대로 끝내는 게 옳은 걸까’라고 말이다. 수명을 다한 것에게 작가는 다시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림책 ‘나는 봉지’는 노인경 작가의 따듯한 호흡이 느껴진다.

아이와 엄마는 장을 본 비닐봉지 꾸러미를 들고서 집으로 돌아온다. 천진난만한 아이와 달리 엄마의 표정은 조금 어두워 보인다. 무슨 걱정이 있는 것일까? 아이를 돌보느라 직장을 그만두고 난 후, 정체되어 버린 수많은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가 어깨를 더욱 늘어뜨리게 하는 건 아닐까.

해맑은 아이에게는 버려진 비닐봉지도 친구가 될 수 있다. 노란 봉지는 바람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라 세상구경을 떠난다. 거리를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신나게 하늘을 날던 봉지는 그만 안테나에 걸려 꼼짝없이 비를 흠뻑 맞게 된다. 그리곤 빗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행인들에게 짓밟혀진 채로 더러워진 비닐봉지를 다행히 누군가 일으켜 세운다. 다시 기운이 난 노란 봉지는 동네 아이들과 숨바꼭질 놀이도 하고, 집 없는 개와 거리의 가수의 노래를 함께 듣기도 한다. 공원에서 만난 고단하고 지친 여성은 노란 봉지에 잠시 기대어 눈을 감고 쉰다. 그렇게 긴 하루 동안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득 담고서 노란 봉지는 아이가 있는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아이는 노란 봉지의 헤지고 찢긴 상처에 밴드를 붙여준다.

마치 수채화 드로잉 북을 보는 듯 가볍고 편안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다. 페이지 수도 인심 좋게 넉넉하다. 사람들의 움직임은 물론이고, 공기의 흐름까지 느껴질 정도로 능숙하고 세련된 붓놀림이다. 마치 작은 열기구를 올라 탄 듯이 노란 봉지를 타고 답답한 공간을 벗어나 청량한 여름날의 거리로 산책을 다녀온 기분이다.

흔한 것이 도시의 비둘기나 사람이나 비닐봉지나 다를 게 무얼까 싶다. 누구나 오래도록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삶을 바라겠지만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어느새 뒤처져가기만 한다.

“많은 것들이 너무 쉽게 사용되고 버려지고 잊혀지고 있습니다. 가끔 살아있는 것들도요. 모두가 일생을 충실히 살아갈 수 있게 실패에 관대하고 충분한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작가의 말이다.

그림책 작가 소윤경